윤리의 정의
윤리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는 ‘당위적 명제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으로 볼 수 있다. “사과는 맛있다.”라는 문장은 사실 사과라는 존재자가 있는데, 그 존재자의 상태가 맛있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면 세계의 모든 언어가 주어와 술어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이 우주 자체가 존재자와 그 상태로 되어 있기 때문일 수 있겠다. 어쨌거나 이 주어와 술어의 합, 다시 말해서 존재자의 그 존재자의 상태를 언어로 묘사한 것을 ‘명제’라고 부른다. 문장과 비슷한 말이다.
그런데 무한하게 많은 명제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어떤 명제들은 술어가 “~이다”라고 끝난다. 반면 다른 명제들은 술어가 “~이어야 한다”라고 끝난다. 앞의 문장을 ‘사실명제’라고 하고 뒤의 문장을 ‘당위명제’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사과는 맛있다”는 사실명제다. 다음으로 ‘사과는 맛있어야 한다“는 당위명제다.
학문마다 탐구하는 명제가 다르다. 사실명제를 탐구하는 학문은 과학이고, 당위명제를 탐구하는 학문은 윤리다. 사실명제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반면, 당위명제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과는 맛있다”는 명제는 직접 먹어보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사과는 맛있어야 한다”라는 명제는 도대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말할 수가 없다. 즉 당위명제는 참과 거짓의 판단을 넘어서 있고, 이에 따라 윤리 역시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다.
윤리와 비슷한 말은 ‘도덕’으로, 일반적으로는 같은 말로 쓰인다. 이 두 단어를 구분하는 방법도 다양해서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렵고, 정작 살면서 이 두 단어를 구분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다만 어감에서 오는 뉘앙스는, 도덕은 실천적인 느낌이 강하고 윤리는 이론적인 느낌이 강하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합의하고 암묵적으로 준수하는 규범이나 규칙을 도덕이라 하고, 그런 규범과 규칙이 정당한지를 의심하고 검토하는 것을 윤리라고 할 수 있겠다.
윤리라는 전체 분야를 딱 반으로 나누면 반은 의무론, 나머지 반은 목적론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의무론은 의무나 도덕법칙을 준수하는 행위를 윤리로 보고, 목적론은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윤리로 본다. 쉬운 예를 들면, 의무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종교인이다. 종교인들은 이미 주어진 도덕 명령으로서의 신의 말씀을 규범으로 생각하고 평생 준수하며 살아간다. 이들에게 옳은 일은 신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잘못된 일은 신의 말씀에 거역하며 사는 것이다.
반면 목적론적 윤리관의 대표적 인물은 안중근 의사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야”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 총을 쏜 것이다. 이때의 윤리관은 좋은 결과를 고려한 행위이므로 목적론적 윤리관에 따른 행위라 할 수 있겠다.
의무론과 목적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성을 토대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시간의 과거, 현재, 미래의 직선을 생각해 보자. 현재의 행위를 할 때, 과거로부터 주어져 있는 의무를 고려해서 행동한다면 의무론자가 되는 것이고, 미래에 발생할 결과를 고려해서 행동한다면 목적론자가 되는 것이다. 결과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을 ‘결과주의’라고 부르고,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무론을 ‘비결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서양을 지나던 거대한 배가 침몰했다. 대피하는 승객들 중 10명이 정원인 구명보트에 11명이 타서 1명이 바다에 내려야만 나머지가 살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의무론자는 살인을 하면 안 된다고 할 것이고 목적론자는 1명을 희생시켜서 얻는 결과가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아서 모두가 죽는 결과보다 더 큰 이익을 창출하기에 1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살아가는지 인지하는가의 여부와 무관하게 평생을 의무론적 윤리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반면 평생을 목적론적 윤리관을 토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 그런 윤리관을 갖고 살아온 삶은 괜찮은 삶이었는가?
현대의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인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적론자들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행위를 할 때, 이 행위가 나의 미래에 이익이 될 것인가를 고려해서 행동한다. 어떤 삶이 더 좋은 삶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판단의 몫은 당신에게 있다.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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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정치적 역할
우리 사회에는 두 주체로서 개인과 집단이 있고, 이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갈등의 상황에 놓인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개인주의,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주의는 각각 이기주의와 전체주의로 극단화될 수 있다. 근현대의 전체주의 폭력을 경험한 현대인은 개인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연권을 찾았다. 자연권은 생명, 재산, 자유의 절대적 보호를 근간으로 한다.
그런데 자연권은 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 민주주의와 충돌할 가능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다수결 방식에 따라 다수의 노동자기 소수의 자본가에게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자본가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에서 사회는 공산화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현실적 측면에서는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한다. 노동자가 절대다수를 점유하고 있고 빈부격차의 과도함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익숙한 상황에서도, 기업과 자본가를 대변하는 보수 집권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미디어가 있다. 미디어가 광고로 유지된다는 태생적인 특성에 기인할 때, 미디어는 필연적으로 기업과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계를 가진다. 그리고 강력한 영향력과 편집의 기교를 통해 미디어가 사회를 점차 보수화한다. 정치적 집권에 대한 이론적 측면과 현실적 측면의 괴리를 설명해주는 주요 연결고리가 미디어의 특성에 있는 것이다.
대중은 정교하고 매끄러운 미디어의 영향 아래 놓이며, 자신의 신념과 사고의 번거로움을 포기하고, 모든 평가와 판단을 미디어에 양도한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 있어서, 자신의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미디어가 대신해주는 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 미디어에 자신의 판단을 양도하는 사람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여유로워지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성공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세계 밖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 못할 것이고, 인생의 깊이를 얻지 못할 것이며,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빛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만큼 주체적인 삶은 없다,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중에서
* 위글 제목 ‘미디어의 정치적 역할’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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