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나폴레옹이 남긴 것들

송담(松潭) 2006. 5. 19. 11:54

 

 

 

나폴레옹이 남긴 것들

 

 

 

 

내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 ”이 유명한 명언은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으며 한 말이다.

 

나폴레옹이 가장 좋아한 말은

배워라, 실천하라, 시도하라 였고,

 

가장 싫어한 말은

모르겠다, 할 수 없다, 안 되겠다

말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의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군 사령관이 되고, 다시 혁명기의 혼란을 딛고 스스로 황제의 관을 썼을 만큼 야망에 불타올랐던 그의 화려한 삶, 그 명암을 조명해 본다.



나폴레옹의 생애


 나폴레옹은 1769년 코르시카섬의 이탈리아계의 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파리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소위로 임관한다. 이 무렵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들은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 강하게 끌려 혁명에 가담했으며 툴롱을 점령한 영국군을 몰아내어 그 공로로 젊은 나이에 육군 준장에 이어, 왕당파 반란자들을 진압한 공로로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고 프랑스 국내군 사령관에 오른다.

그의 뛰어난 지휘하에 그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승리를 거듭하며 유럽 여러 나라에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전파했을 무렵, 파리에서는 왕당파가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부하를 보내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세웠으며, 영국을 봉쇄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자청했으나 영국 해군에게 전멸 당한후 고립된다, 이때 프랑스는 대내적으로 정치적 혼란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돌아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는 폐지되고 통령정부가 들어선다. 통령정부의 행정개혁과 경제 개혁, 사법개혁은 프랑스를 어느 정도 안정시켰으며,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는등 더욱 높아진 인기에 힘입어 국민투표를 통해 나폴레옹은 종신통령에 올라 제정을 선포한다.

왕정 타도를 외치던 프랑스인들은 30년이 채 못 되어 열렬한 환영 속에 그들의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민법을 집대성하여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했고 교육제도를 개혁했다. 한편 전유럽을 제패하려는 의도로 영국에 대륙봉쇄령을 시도했으나 이 정책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과 교역하던 유럽 각국의 반발을 심하게 사게 되었다. 이 때부터 나폴레옹의 몰락은 가속화된다.

스페인 원정에 실패하고 러시아를 응징하고자 50만 대군을 이끌고 떠난 원정은 러시아의 혹한과 초토화 전술에 휘말려 수천 명의 군사만 생환한 완전 실패였다.

 나폴레옹은 결국 퇴위했으며, 지중해의 엘바 섬으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후 자칫 혁명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프랑스인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행동을 개시해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백일 천하’를 누린 다음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중심의 연합군에게 대패해, 대서양의 외로운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어

20대에 프랑스군 사령관, 30대에 황제가 되었던

그는 52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했다.



 나폴레옹의 평가


 1823년, 나폴레옹의 구술을 토대로 한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이 간행되고 나서 나폴레옹은 신화적인 존재로 부풀려졌다.

그러나 공정히 평가하자면 그는 프랑스의 혼란기에 등장한 독재자였으며 전 유럽을 지배하고자 했던 야망에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정복자였지만 뛰어난 전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술과 리더십, 냉철하고 공정했던 성품은 그의 이미지를 존경할 만한 지도자로 덧칠해 놓았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에게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그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대내적으로 혁명 후 혼란했던 프랑스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대외적인 정복전쟁이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전파한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럽 국가들과 치른 전쟁을 대부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승리는 탁월한 전술에 있기도 했지만 혁명을 이뤄낸 프랑스 시민군들의 정신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외세의 무력에 퇴색되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무기를 잡고 일어섰으며 유럽 전체에 혁명 정신을 전파하는 데 용감히 앞장섰다. 나폴레옹은 이 점을 십분 활용하였고 이들에게 유럽 제패의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자유주의와 평등사상, 민족주의가 유럽에 팽배해진 것은 전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군의 무력에 짓밟힌 유럽 각국에는 이에 대한 반발로 민족주의가 붐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는 대프랑스 동맹을 강화시켜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왔다. 결국 그는 혁명의 완성을 위해 등장하여 혁명정신의 전파 이후 사라져간 세기의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던 그도 독재자다운 말로를 걸었다. 그는 야망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자신의 야망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자가 얼마나 쉽게 몰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나폴레옹의 주요 일화들


하나. 유년시절의 나폴레옹

 

◇ 야망과 인내 ◇


 어릴 때부터 나폴레옹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참고 노력했다. 군인 학교와 사관 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의 시골뜨기로서 항상 못 먹고 못 입어 볼품없는 모습이었으므로 지체 높은 집안의 아이들로부터 경멸과 무시를 받았다. 가난에 시달리는 외톨박이가 젊은 시절 그의 대표적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무지개를 잡으러 한나절을 달려 먼 바닷가까지 갔던 나폴레옹이었기에, 어려움을 꿋꿋하게 참으며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그는 ‘패배 속에서 영광없이 살아가는 것은 매일매일 죽어 가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한 것이다. 마침내 한때의 유럽 대륙은 그의 무대가 되었고 그는 무대의 가장 중심에 선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즐기는 수학과 독서의 왕 ◇


 나폴레옹은 특히 수학을 잘하고 좋아했는데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두번째 유배가는 도중에도 수학문제 푸는데 열중했으며."수학의 발전은 국력에 비례한다." 는 말을 남길 만큼 수학을 높이 평가했다. 전쟁과 대포, 대포와 탄도(彈道)의 연구에는 수학이 필요했다. 나폴레옹이 수학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유년시절부터 책방의 책을 온통 다 삼켜 버릴 듯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다방면에 걸친 재능은 독서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서랍같은 두뇌의 소유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은 독서를 했다.

그가 추방되어 최후의 약 6년을 보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도 책을 많이 읽었으며 서고에는 약 3,000권 이상이 소장되고 있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책을 본후 그내용을 요약해서 기록하거나 감상문을 적어 두기도 했다. 이른바 독서 노트를 만들었다. 이렇듯 나폴레옹은 유년 시절부터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탐욕스러운 독서가였다.


◇ 시간의 소중함 ◇


 나폴레옹의 유난히도 시간을 아끼는 습관 때문에 생긴 고질적인 위 질환 및 각종질병으로 아픈 배를 항상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수면시간은 고작 2~3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부지런히 일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서는 차분히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고 또한 어떤 일에도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을 계획하기 전에 오랫동안 잘 생각하여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를 예측하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때나 극장에 있을 때나 언제고 일을 생각하며 늘 일하고 있다. 밤이라도 잠이 깨며 일을 한다. 나는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오늘 헛되이 보낸 시간들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간절히 바라던 내일이다.

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시간의 소중하게 여겼다.

 

둘. 지도자로서의 나폴레옹

 

◇ 솔선 수범 ◇


  나폴레옹은 뛰어난 전술가였는데, 그의 전술의 특징은 공격을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전격적인 공격은 상대방의 기를 꺾어 소수의 불리한 군사적 상황에서도 다수의 유리한 상대방을 격멸할 수 있는 핵심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전술보다도 중시한 것은 병사의 사기를 북돋우는 일이었다. 젊은 시절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늘 앞장서서 공격을 지휘하였고, 전선에서는 병사들과 함께 잠을 잤다. 병사들은 그에게 친밀감을 느껴 ‘작은 하사’라는 애칭을 붙여 주기도 하였다.

 거기에다 병사들은 나폴레옹과 함께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또 (초반에는) 혁명의 이념을 전파한다는 자긍심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용감했지만 나폴레옹과 함께 있을 때는 더욱 용감했다.


◇ 상호신뢰와 공동목표 ◇


  전쟁 중 어느 한밤이었다. 그가 순찰을 돌던 도중 선채로 잠을 자는 병사를 발견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병사대신 날이 샐 때까지 그 자리에서 대신 보초를 섰다. 날이 새자 자고 있던 병사가 잠을 깨고 놀라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죽여 달라하였으나 그는 '너와 나밖에 본 사람은 없다, 그것으로 됐다'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날이 밝아 전투가 시작되자 그의 병사들은 추위에 고전하며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한명의 병사가 적진을 향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을 목격한 다른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 자신들도 죽을힘을 다해 적군과 싸워 그 전투를 승리로 만들었다. 전투가 끝난 후 나폴레옹은 그 병사를 찾았으나 그 병사는 보이지가 않았다. 한참을 찾은 후 나폴레옹은 싸늘한 시신으로 남아있는 병사를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처럼 나폴레옹은

지도자로서 자신의 추종자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신뢰를 쌓았고

공동의 목표를 성취해 나갔다.

사기 진작과 훈장의 시초 ◇


 나폴레옹은 개개인의 병사들에게 자신의 총통솔자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병사 하나 하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들이 출전했던 전장이나 신상명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병사들이 충성심을 고취시켰으며,

어느 전투에서 병사가 큰 공을 세워서 나폴레옹이 상으로 마땅히 줄 것이 없어서 자신의 옷 단추를 떼어 주어 그 후로 그것이 훈장의 시초가 되었다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셋. 야심의 절제가 필요했던 나폴레옹


자유평등박애의 혁명 이념을 유럽에 전파시키고자 했던 나폴레옹 전쟁은 점점 정복 전쟁으로 모습이 바뀌어 갔다. 많은 전쟁 가운데 그의 생애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은 러시아와의 싸움이었다.


  1812년 5월, 나폴레옹은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 갔으나, 악조건에서의 오랜 행군으로 많은 병사를 잃고 말았다. 온갖 고생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하였으나, 러시아 병사들의 초토화 작전으로 이미 식량과 사람들은 모두

숨겨진 뒤였고, 게다가 큰 불을 만나 잠잘 곳 마저 잃게 되었다.


  기아와 추위 속에서 후퇴를 서둘렀으나 러시아 병사들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니에멘강을 건너 폴란드에 돌아 왔을 때, 주위에 겨우 5천여 병사만이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타협을 모르는 야심가였다는

또 하나의 단면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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