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史記)의 편찬자 사마천(司馬遷:대략145~85 B.C.)은 하양현(夏陽縣)에서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자장(子長)이다.
7세 때 아버지가 천문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太史令)이 된 이후 무릉(武陵)에 거주하며 고문을 독서하던 중,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BC 111년에는 파촉(巴蜀)에 파견되었고, BC 110년에는 무제의 태산 봉선(封禪)의식에 수행하여 장성일대와 하북∙요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기원전 110년 사마담이 죽으면서 《사기》의 완성을 부탁하였고, 그 유지를 받들어 BC 108년 태사령이 되면서 황실도서에서 자료 수집을 시작하였다.
BC 104년(무제 태조 원년) 천문 역법의 전문가로서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에 참여한 직후 《사기》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보임안서(報任安書)〉라는 명문에서 당시 《사기》의 완성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 없었던 심정을 술회하였는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BC 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 직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었으며, 기원전 90년에는 마침내 《사기》를 완성하였다.
2. ‘사기 저술 동기와 목적
사마천의 개인적인 품성은 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선비들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삐 풀린 듯 자유 분방한 기질을 갖고 있었으며, 학술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강개하며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강했던 전국시대의 사림문화는 사마천의 인격과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사서를 편찬한 목적은 「天과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고 古今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밝혀 스스로 독자적인 立論의 체계를 이루려는 것(成一家之言)」이었다고 한다.
사마천이 부자 양대에 걸쳐 태사령이란 사관 직에 있었기 때문에 부친의 遺業으로 사서를 써야 한다는 단순한 직업적 의식 외에 새로운 사서 편찬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자각적 사명의식의 계승이라는 외면적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
사기의 저술동기와 목적을 다음 세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첫째, 春秋의 繼承이다.
사마천 부자가 자신의 저술활동에 춘추의 계승이라는 의미를 명확히 부여하였던 것은 사마담의 발언을 보면 알 수 있다.
공자가 죽은 지 이제 500년이 되었으니 누군가 그 뒤를 이어 세상을 밝히기 위하여 「易傳」을 바로잡고 「春秋」의 정신을 계승하여 「詩經, 書經, 禮, 樂」의 정신을 찾는 사람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太史公自書) 이 발언은 공자의 「春秋」저작을 그 문명의 보호∙전승이란 점에서 의식한 것이 분명하다.
즉 사마천 부자에게 있어서 「春秋」의 계승은 天運 大變에 따른 역사적 과제의 자각과 그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 구체적인 표현이 「史記」로 結晶된 것이다.
둘째, 太史令의 職分이다.
太史公自書에서 사마천 부자는 역사의 기록 또는 서술을 太史令의 임무로 누차 강조하고 있고, 그 임무의 수행 상 春秋를 계승한 史書를 저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태사령의 직분과 결부시켜 주장한 것은 掌天官의 임무가 큰 차원에서 보면 不治民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治民에 대한 강렬한 의지
와 그것에 참여하려는 긍지를 과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며, 사마천 부자가 현실적으로 영예나 공명과는 거리가 먼 太史令의 지위
를 중시한 것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李陵의 禍이다.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하려다 연루되어 결국 宮刑을 스스로 택하였으며, 그 명분을 史記저술의 완성에서 찾았고, 그는 史記저술의 역사적 필연성과 중대성을 자각하였던 만큼 담담하게 宮刑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자신이 宮刑을 받은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식은 땀이 나고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틀렸으며, 정신이 몽롱해 우왕좌왕"하는 극도의 수치심에서 오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유일한 위안은 자신이 宮刑을 선택한 명분, 즉 史記의 완성에 전념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이 제2의 공자가 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 굳게 믿었다. 그가 궁형의 치욕을 뒤로하고 분발하여 『사기』를 저술할 수 있었던 거대한 힘의 원천이 여기에 있었다.
사마천은 여기서 정신적 위안을 얻었고 항상 시들지 않는 열정으로 충만할 수 있었다.
공자가 『춘추』를 통해 제왕의 법도를 만들어 훗날의 성인들을 기다렸듯이,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하여 "환관(宦官)"이 아닌 "사관(史官)"으로서 자신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기다렸다.
3. ‘사기의 내용과 평가
《사기》는 한나라 때의 역사가인 사마천이 지은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 역사서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본기〉는 태고로부터 한의 효무제에 이르는 2,500년 동안 왕자들의 흥망성쇠를 기술한 일종의 정치사이다. 사기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개설서로 보면 된다.
〈세가〉는 열국사라고도 할 만한 제후들의 정치사이다. 선진시대의 제후 및 한대의 제후들 또 공자를 다루었다.
〈서〉는 8권으로 돼 있다. 인간의 예의를 다룬 〈예서〉, 음악에 대한 〈악서〉, 군사문제를 다룬 〈율서〉, 계절변화와 우주, 인생에 대한 성찰을 다룬 〈역서〉, 천문을 논하는 〈천관서〉, 제사의식 문제를 다루고 있는 〈봉선서〉, 수리문제를 논한 〈하거서〉, 경제
문제를 다룬 〈평준서〉가 그것들이다.
〈표〉는 연표 즉, 연대표이며 역사의 달력이다
.
〈열전〉은 인물들의 전기로, 일세를 풍미했던 개인의 사적을 적은 것이다.
사기가 씌어지고 난 후 2천년 동안 중국의 모든 역사서 중에서 가장 널리 읽혔던 책 중의 하나였다 그 체제는 후사에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어 왔다.
사기는 격동에 산 인간과 온갖 인간관계를 설명한 책으로서, 그 속에 인간에 관한 모든 자료가 들어 있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고 거울삼아 사는 방법과 지혜를 그 시대 인물들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기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날로 복잡해져가는 오늘의 환경 속에서 더욱 더 정채를 발하고 많이 읽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우리들 또한 그 내용에 어느 때는 감동하고 흥분하며, 분노하기도 하고 가슴에 새겨두기도 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이 사마천이 2천년 전에 우리에게 남기고자 한 메시지가 아닐까.
『사기』야말로 중화민족의 수천 년 문화에 대한 기록과 총결산인 동시에 사마천의 위대한 인격의 체현이며, 사마천의 심적 창조와 생명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