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과 미국의 남북전쟁
1. 흑인노예의 역사
미국 남북전쟁은 원인이 된 노예제도가 발생된 배경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이곳에 이주한 유럽인들은 그곳에서 사금채취와 탄광작업, 농사일 등을 위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원주민인 인디오들은 유럽인들이 들어온 직후 천연두등의 질병에 감염되어 속수무책으로 다수가 희생되었거니와, 장시간의 힘든 노동에 적합하지 못함이 판명되었다.
그리하여 식민지 경영자들은 유럽인들을 데려와 예속적인 노동자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유럽인들을 가지고 신대륙의 노동력을 충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백인 노예보다 훨씬 값이 싸고 평생 부려먹을 수 있는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이 아메리카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는데, 플랜테이션이 발달함에 따라 노예무역이 본격화되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을 1766년에 노예제도를 서서히 폐지시킬 수 있는 계획이 채택되기를 바랐다. 노예무역은 의회의 금지조치로 1808년에 사라졌지만 그 이후에도 남부지방에서는 노예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졌다. 그 이유는 남부지방의 경제적인 근간이 대단위의 농업에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2. 남북전쟁의 원인과 배경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룬 아메리카합중국은 독립한 직후에는 견고한 통일국가라기 보다 13개식민지(州)의 단순한 집합체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정부 권한을 강화하여 국가적인 통합을 추진시키려는 연방주의자와 이와 반대로 주권(州權)의 존중을 주장하는 분리주의자와의 대립이 있었다.
남부와 북부는 세계경제와의 연관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850년대에는 산업혁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고 이시기에 미국은 단순한 농업국가로부터 농업․공업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업화는 주로 동북지구에서 진행되었고 공업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어 공업발전을 위해서는 영국으로부터의 공산품 수입을 제한할 수 있는 보호무역과 연방정부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이에반해 남부지구는 인구의 5%에 불과한 지주들이 4백만이 넘는 노예의 지배를 통하여 목화, 연초, 사탕수수등을 재배하는 대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농산품이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남부지구로서는 자유무역과 주권존중의 지방분권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경제적 기반의 차이는 노예제도의 존속을 놓고 남부와 북부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한편 노예해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1833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반노예협회”라는 노예해방단체가 설립되었고 개리슨은 1830년대에 노예해방을 위하여 『The Liberator』라는 신문을 발간하여 노예제도는 미국이 갖고 있는 가장 악마적인 요소로서 즉각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852년에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출간되어 흑인노예의 참상을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3. 남북전쟁의 발발과 경과
노예문제로 남북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던 참에 1860년 노예제에 반대하는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이에 반발하여 남부 7개주(뒤에 4개주 추가)는 분리독립을 선언하고 1861년에 엘라바머주의 몽고메리에서 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노예제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861년 4월 남부가 섬터요새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남북전쟁은 애초에 북부가 월등히 우세한 형편에 있었다. 북부는 남부의 두배가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었고
우수한 공업생산력과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1863년 1월 1일에 링컨대통령이 노예해방령을 발표한 이후에 남부의 많은 흑인노예들이 북부로 도망갔고 뿐만아니라 국제여론도 북부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남부가 기대했던 영국 개입이 좌절되어 전쟁은 남부측에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남북전쟁의 최대의 격전은 1863년 7월에 벌어진 게티스버그에서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남부는 전 병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8천여명이 전사 혹은 부상당하였고, 링컨대통령의 게티스버그의 연설은 후세에 널리 알려졌다. 전쟁의 막바지에 다다른 1865년 1월 링컨은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노에제를 폐지하였다.
북부의 그란트 장군은 4월 3일에 남부의 리장군측의 저항을 일축하고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함락시킨 뒤 리장군의 항복을 받아냈고, 노스캐롤라이나로 진격해 들어간 셔먼장군 휘하의 북군도 4월 26일에 존스턴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남북전쟁 이후의 상황
종전과 함께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링컨의 암살사건이었다.
1865년 4월 14일에 링턴은 워싱턴의 한 극장에서 “Our American Couson"이란 연극을 관람하던 도중 남부출신의 배우인 부스에게 암살된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에 10년동안 군정이 실시된 남부의 사회경제구조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즉 남부에서는 노예제에 기반을 두었던 대농장경영이 사라지고 다수의 소규모 농원이 생겨났으며 북부의 자본가들이 남부에 투자하여 섬유, 담배, 제철등의 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중산계급이 형성되는등 사회경제구제에 전면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북부에서는 공업발전이 현저하여 1860-1870년 사이에 공업생산은 배로 증가하고 농업과 교통수단에도 큰 발전이 이루어져 미국의 자본주의는 남북전쟁을 계기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넓은 의미의 경제혁명을 겪게 되었다.
남북전쟁은 미국이 통일된 국민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였으며 전쟁을 통해 국내에 남아있던 식민지적 성격을 타파하고 통합된 광대한 국내시장을 바탕으로 자유노동에 입각한 자본주의가 비약적인 발전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노예제의 존폐문제로 표면화된 인종문제는 남북전쟁이 종식된 이후에도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1890년으로부터 1915년사이에는 흑인의 독립과 자치권을 주장하는 운동인 뉴 니그로 운동이 대두되었는데, 이에 대해 백인들은 자신들의 절대적인 우위 및 흑인에 대한 정치․경제적 지배 상태를 고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지금현재까지도 인종차별 문제를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는 상태다.
< 링컨의 어록 >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링컨
국민의 일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속일 수는 있다. 또한 국민의 전부를 일시적으로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 전부를 끝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링컨
그랜트 장군의 위대한 점은 침착하면서도 목표에 집요하게 매달린다는 점이다. 그는 쉽게 흥분하지 않으면서도 불독같이 용맹스럽고 끈질기다.
그의 이빨에 한 번 물리면 그 누구도 끄집어낼 수가 없다. -링컨
나는 계속 배우면서 나는 갖추어 간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링컨
나는 찬스가 올 것에 대비하여 배우고,
언제나 닥칠 일에 착수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추고 있다. - 링컨
나는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뒤로는 가지 않는다.
- 링컨
나이가 40을 넘은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링컨
만나는 사람마다 교육의 기회로 삼는다. -링컨
변호사가 되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면
그것만으로 목적은 절반이나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꼭 성공하고 말겠다고 결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항상 명심하라. -링컨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게 될 것인지는 자기의 결심에 달려 있다.
-링컨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길이 열리게 마련이다.
-링컨
일이란 기다리는 사람에게 갈 수도 있으나,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자만이 획득한다.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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