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을 축출한 모택동 전술 |
1.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
중국 내의 양대 세력이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1930년대 말, 일본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제2차 국공합작을 하게 된다.
그 결과로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되나, 항일전의 종료는 내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1920년대 말, 국민당과 공산당이 군벌세력의 타도를 위해 결성했던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진 이후로 양 세력은 전투와 대립을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민주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미국은 자신들의 증가된 공업력의 발산을 위한 새로운 시장개척의 필요성에서 일본이 가졌던 중국 내의 이권을 자신들이 가지기를 원했고, 공산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소련 역시, 코민테른을 통해 중국 공산당에게 많은 지령을 내리고,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또한 서서히 고조되어가는 세계의 냉전의 분위기는 국민당이 정전협정 이후에 공산당을 공격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2. 일본의 패망 이후 중국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에 곧바로 돌입하게 된다. 물론 모택동과 장개석이 참여하는 중경교섭(中京交涉)이 열리기는 하였지만, 그 것과는 별도로 각처에서 양당간의 전투는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1946년 1월 국-공 양당간의 정전협정이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국민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7월 공산당에 대한 동북지역 총공세에 나서게 된다.
이후 1947년 초까지는 어느 정도 국민당의 우세로 전투가 진행되었으나, 수많은 군사적-정치적 요인들로 인해 서서히 전세는 바뀌기 시작하여 1947년 5월에는 공산당의 전면적인 반격이 진행되고, 48년 9월 제남-평진 등에서의 국민당 주력군의 패배로 사실상 공산당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1949년 초에 장개석과 국민당 지도부는 패배를 인정, 재빨리 대만으로 후퇴하게 되고,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이 이끄는 中華人民共和國의 성립이 이루어진다.
모택동은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자인 동시에 지도자이면서 시인이자 서예가 이다. 1893년 12월 26일 호남(湖南) 상담(湘潭) 소산충(韶山沖)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서, 1976년 9월 9일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8년 모택동은 <정강산의 투쟁>, <작은 불티가 들판을 태울 수 있다>등의 저작을 발표하여,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자는 전략 사상을 제기하였다. 여기에서 중국적 특색을 갖춘 신민주주의 혁명으로 승리를 쟁취하자는 모택동 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항일전쟁 시기에도 <중국혁명과중국공산당>, <신민주주의론>,<연합정부론>등의 저작을 발표하여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의 이론, 정책, 정치, 경제, 문화강령을 천명하였다. 1958년 모택동은 대약진운동과 농촌의 인민공사화운동을 일으켰으며, 중국인들은 모택동이 자주독립과 주권을 수호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종일관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를 반대해 왔으며, 일생을 통해서 중국혁명 건설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중국인들은 이러한 그의 공적이 과실보다 훨씬 더 많다고 여기기 때문에 여전히 그를 중국인민의 우상으로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본명은 중정(中正), 손문의 뒤를 이어 중국 국민당을 장악하여 손문이 제창한 연아, 용공, 노농원조의 정책을 계승하지 않았다. 전국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의 물결속에서, 1926년 7월부터 국민혁명군은 장개석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진격을 시작했다. 이른바 북벌이다.
혁명군의 계속되는 승리는 결과적으로 자본가, 지주세력, 제국주의 세력의 이익을 위협하게 되었고, 국민당내의 우파로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좌우 대립의 격화 속에서 장개석은 상해 점령 직후인 1927년 4월 12일에 노동자와 공산당원을 체포, 학살했다.
(4․12 쿠데타) 이로써 국공합작은 깨어졌고, 장개석은 당내 반대파를 억누르며 독재를 강화하고 공산당을 탄압했다. 1930년 겨울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산당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사상적으로는 일종의 보수적 전통주의를 강화시켰다.
이후 장개석은 항일을 위한 국공합작을 시작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다시 공산당과 결별하고 내전을 시작했다. 장개석은 일인지배 일당독재에서 비롯된 심각한 부패를 막지 못했고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공산당에 비해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했으면서도 장개석과 국민당은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여 1949년에 대만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3. 승리를 이끈 모택동 전술
모택동이 일본군에 항전하기 위해서 진격하여, 북쪽 목적지에 도달한 부대는 10만명 중 3만명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패배를 통해서 중국공산군의 그 유명한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전술을 개발했다.
적이 전진할 때 우리는 후퇴한다.
적이 정지할 때 우리는 괴롭힌다.
적이 전투를 피할 때 우리는 공격한다.
적이 후퇴할 때 우리는 전진한다.
모택동 전술ꡓ은 인민은 물이요, 게릴라전을 하고 있는 인민군은 물고기다ꡓ
이렇게 가르치면서 군 내부의 심리전, 적에 대한 심리전, 그리고 대민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절대로 전투에서 서두르는 법이 없었고, 불리하다고 생각이 될 때는 언제든지 철수하는 융통성을 보였다.
공산군은 국민당군의 주둔지 어디든 첩보망을 심어놓아서 국민당의 움직임을 언제든지 파악하고 있었고, 또한 승급과 강등을 철저히 전공에 따라 하였기 때문에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는 국민당과 비교해서 월등한 사기를 유지할 수 있어 적은 군사를 가지고 많은 장개석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민중(농민)의 지지와 모택동 전술이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의 성공요소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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