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항우와 유방

송담(松潭) 2006. 5. 19. 10:59

 

 

 

항우와 유방

 

 

 

1. 초한전(超限戰)의 개관

 진나라 말기에 진승(陳勝)ㆍ오광(吳廣)의 반란을 시작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활약상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진다.

중국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흥미진진했던 싸움으로 BC 3세기말 초(楚)의 명문 출신인 항우(項羽 , BC 232~BC 202)와 중농 출신에 불과하였던 유방(劉邦, BC 247 ?~BC 195) 과의 전쟁이다. 전력면에서 항우는 절대 우위에 있었지만 결국 실패자로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고 유방은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의 고조가 된다.


2. 대비되는 항우와 유방의 성격

     <항우>

 가. 초나라 장군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항우(項羽)는 본래 학문에는 뜻이 없고 무예에만 열중하여 학 식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배경은 자연히 남을 깔보는 성격 을 갖게 되어 인재가 따르지 않았고 그 후 유일한 참모인 범증  (范增)과도 결별을 하게 된다.

 

힘으로는 천하를 제압하고도 남음이지만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여 패한 사람이었다.

어딘가 빈 구석이 있는 항우의 이런 인간적 약점 때문 에 지금의 우리에게 흥미를 갖게 한다.

 

 나. 한고조 유방(劉邦)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라는 미관 말직에서 시정잡배들과 거들먹거리던 자였다. 유방은 이런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교류를 하면서 세상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 하고 성격을 강인하고 치밀하게 하였으며 항상 부하들을 포용할 수 있는 도량을 갖게 되었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은연중에 갖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유방>



3. 홍문의 회(鴻門-會)

 항우와 유방의 극적인 대결의 절정으로 홍문의 연회이다. 수세에 몰린 유방의 전전긍긍한 계략우위에 있으면서도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한 항우의 대조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관중지역에 들어갔을 때 이미 유방이 먼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을 점거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항우의 마음은 몹시 불쾌하였다. 그 이유는 초회왕과 “먼저 관중지역을 차지하는 자가 왕이 된다ꡓ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항우의 군대는 40만명이고 유방의 군대는 10만명으로 절대적 우세인 군사력을 이용하여 황우는 유방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것을 미리 간파한 유방은 대적하기 보다는 자신을 낮추고 항우에게 화의를 청하였다. 이에 항우의 참모인 범증은 사죄하러 홍문에 오면 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유방을 죽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홍문의 회 ’에서 항우는 우위에 있으면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황우는 이러한 우유부단한 태도와 독선에 빠져 범증이라는 책사(策士)를 점점 멀리하더니 결국에는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는 장량에서의 싸움에서 그동안 항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죽음에 이르게 된다.


 

4. 유방의 승리의 원인

 미천하고 비굴하기까지 한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사카이야 다이치(‘조직의 성쇠’저자)부하들의 능력에 따른 역할 분담과 적재적소에 능력자로 배치활용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귀족집안 출신이면서 용맹한 항우는 세월이 흐를수록 선대의 책사인 범증의 충언을 멀리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고 정책을 폈지만, 출신이 별 볼인 없었던 유방은 “한흥삼걸(漢興三杰)”로 불리는

소하, 장량, 한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이들을 통하여 채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가. 소하(蕭何 , ?~BC 193)

 초한전 때 주로 양식과 군병의 보급, 조달을 담당했다. 수십만의 유방의 군사를 한 번도 굶기지 않았을 정도로 보급의 달인이었다. 내정, 민생안정, 군량조달, 보급로 확보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초나라에서 온 한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유방에게 추천했던 사람도 소하이다.


나. 장량(張良)

 “장막안에서 전략을 세워 천리 밖에서의 승리를 결정진다”고 말하여질 정도로 선견지명의 책략가다.

전면에 나서 싸우지 않지만 유방에게 적재의 간언(諫言)과 충언(忠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웠다. 진평과 함께 이간계(離間計)로 항우의 군사 범증을 물리치고 한군의 승리를 가져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 한신(韓信)

 초한전에서 유방과 항우를 떨어뜨려 말할 수 없지만, 또한 유방의 일등공신이자 중국 역사상 너무도 잘 알려진 이름으로 한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그에 관한 일화도 많이 남겼다.

 


한신의 보은(報恩)

 

 한신은 가난하기 짝이 없어 하향현 남창정의 관리집에 빌붙어 살고 있었다. 그 관리의 아내는 한신을 귀찮아하며 그를 위해 밥상을 차려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스스로 그 집에서 나와 성 밖에서 낚시질을 하며 허기를 달래고 있을 때 빨래하던 한 노파가 가엾이 여겨 수십일 동안 밥을 먹여 주었다.


하루는 한신이 회음이라는 지방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한신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보고 동네의 불량배들이 조롱을 하였다. 그 중 한 녀석이 한신을 심하게 조롱하였다.

“당신이 만약 나를 죽일 수 있다면 차고 있는 그 칼로 나를 찔러 보시지! 만약 나를 죽일 수 없거든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든지!”

한신은 분을 꾹 참고 그 가랑이 아래로 빠져 나갔다.


후에 한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신으로 초나라 땅의 제후가 된 한신은

관리의 아내, 노파, 모욕을 준 소년을 불렀다.

노파에게는 천금을 주고 그 온정에 감사해 했고 관리의 아내에게는 백냥을 주면서 “당신은 참 시시한 사람이기에 이만큼만 주는 것이오”사람에게

은덕을 배풀고도 그것을 끝까지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모욕한 소년에게는 지금으로 말하면 경위 정도의 벼슬을 주면서 칭찬하였다.

“이 사람은 용감한 사나이다. 이 정도의 사람을 어찌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때 그렇게 참았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는가?

그 보답으로 이런 벼슬을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