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송담(松潭) 2006. 5. 19. 11:29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1. 중국의 개혁․개방 이전 : 문화혁명

  1965년 시작되어 1976년 10월 막을 내린 문화대혁명은 계급투쟁과 혁명의 지속을 꿈꿨던 모택동의 작품으로, 임표를 비롯한 4인방으로 불린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이 주연을 맡은 총체적 사회 개조운동이었다.

  중국에서 수정주의의 발생과 자본주의의 부활을 막기 위해 부심했던 모택동이, 그가 교시한 조반유리(造反有理, 반항에도 이유가 있다)와 혁명무죄(革命無罪, 혁명에는 죄가 없다)를 내세운 조반파

(造反派)와 홍위병을 앞세워, 혁명원로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의 실권파들을 타도한 정변으로, 1976년 9월 모택동이 죽은 후 엽검영, 화국봉, 왕동흥 등 당 원로에 의해 4인방이 축출됨으로써 막을 내린 중국 현대사의 대사건이다.


  문화대혁명은 정치, 경제, 과학, 문화, 교육 등 중국 사회 모두를 크게 파괴하였으며,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거치면서 확립된 수준 높은 공산당의 기강과 우수한 정신풍조를 말살해 버렸다.


  말년의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의 공과를 반성하면서 7은 잘됐고, 3은 못됐다고 했지만, 사실상 문화대혁명 10년은 중국 현대사

에서 잃어버린 10년으로 남았다.


 

2. 중국 개혁의 단초, 등소평ꡑ의 등장


  등소평(鄧小平:1904~1997)은 마르크스주의자,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가이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중국공산당의 아버지인 모택동의 최고부하들 중 하나였으나, 후일 모택동의 잘못된 통치행위들 -예컨대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등-을 비판했다가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모택동 사망 뒤, 모택동의 아내 강청 등을 비롯한 4인방의 폐해 때문에 중국인민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등소평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가. 1904년 8월 24일 등소평은 사천성 광안현(廣安縣) 협흥향 (協興鄕) 패방촌(牌坊村)에서 태어났으며, 1918년 말에 사천성 중경(重慶)이 있는 프랑스유학 예비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년 후인 16세 때에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으며,

1924년 국내혁명으로중국에 돌아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등소평은 유럽 총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나. 1933년에는 반라명(反羅明)노선을 일으켜 모택동(毛澤東)의 주장을 옹호하다가 당내의 좌경 세력에 의해 모든 직위에서 파면당하였다.


 

그 후 1956년에는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당선, 1965년 1월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였으며,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타도 대상에 올랐던 유소기(劉少奇)에 이어 그도 공개적인 비판을 받고 중남해(中南海)에 연금되었다.


  다. 1973년 3월 그는 부총리직에 복위되어, 8월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12월에는 다시 해방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1976년 1월 8일 주은래가 사망하고 그해 4월 5일 천안문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는 천안문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다시 당내외의 모든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라. 1978년 그는 중국공산당의 주요한 정책 결정권자로서 사회주의 노선의 견지, 인민민주전정의 견지, 공산당 영도의 견지,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의 견지라는 4개 기본 원칙을 주장하였으며,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현대화건설을 강조했다.


  마. 1982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으며, 1989년 11월 중국공산당 13기 5중전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사임하였다.


  바.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중국식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수립하여 개혁의 행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을 천명하였으며, 1997년 2월 19일 북경에서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등소평의 개혁이론으로써 흑묘백묘론은 중국 지배계급의 달라진 태도를 의미하며, 경제, 학문, 문화,

생활 등의 영역에서의 개혁을 의미한다.

  시장 경제 체제로의 전환은 모택동의 경제 전략의 체계적 수정 폐기를 의미하며, 등소평의 묘론은

그가 실권을 장악한 후에 제기한 것이 아니고 일찍이 60년대 초에 과감하게 주장한 것이다.

  문혁시기에 강청(江靑)은 등소평의 10대 죄상을 규탄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흑묘백묘론이다. 1962년 등소평은 돌연히 가정단위 도급생산과 가정단위 영농을 주장하여

개인 경영 바람(單幹風)을 불러 일으켰다.

 

                 

흑묘백묘론(黑猫百猫論)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과감한 실용주의자였던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ꡑ 등소평은 79년 미국 방문 후 ‘중국을 발전시키는 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건   공산주의 경제체제건 관계없다ꡓ

흑묘백묘론을 주장했다. ꡐ

선부론(先富論: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부유해져라)ꡑ과 함께 오늘날 ꡐ세계의 공장ꡑ으로 우뚝 선 중국을 있게 한 대표적 사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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