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나는 몸이다

송담(松潭) 2022. 9. 20. 15:44

나는 몸이다

 

 

나는 전적으로 몸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혼은 몸에 속하는 그 어떤 것을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에게 인간은 몸입니다. 당연히 삶 또한 몸입니다. 몸에서 시작해서 몸으로 끝나는 것이 니체의 인간입니다.

 

플라톤 이래 최고의 지위를 누려 온 것이 이성 혹은 영혼이었습니다. 근대까지 철학자들은 인간을 영혼과 몸(신체)으로 분리하고 영혼에 신적인 권위를, 몸에 불완전성과 타락성을 부여했습니다. 영혼은 고귀하고 몸은 더러운 것이라는 관념이 그것입니다. 이성과 영혼의 고귀함을 찬양하고 몸을 무시 혹은 경멸하는 것은 철학의 전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이성과 영혼조차 몸에 속하는 것이며 몸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성은 작은 이성이며 몸이야말로 커다란 이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에게 영혼이나 정신은 몸의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니체는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경멸은 존경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경멸할 때 그것은 강한 질투심의 발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경멸이 극단적일수록 질투와 경외감은 강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몸을 경멸하고 있을 때조차 몸의 명령에 따르고 그것에 봉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니체입니다.

 

몸이 아프면 소극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큰 병에 걸릴수록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쉽고요. 반면 몸이 건강하고 활기찰 때는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물론 병이나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도 창조적 활동은 가능합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이겨 내면 큰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경을 이겨 낸 사람이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보다 강한 이유입니다. 몸의 건강은 병에 걸렸느냐가 아니라 몸이 병을 극복하려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니체는 평생 병에 시달렸습니다. 두통과 근시가 그를 괴롭혔고 우울증과 발작이 이어졌습니다. 건강할 때보다 아플 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 삶을 긍정하는 철학을 탄생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니체의 말처럼 고통에는 쾌락과 동일한 분량의 지혜가 담겨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몸이 병을 이겨 낼 의지를가졌다면 우리의 철학은 더 밝고 명랑해질 것입니다. 병과 싸워 그것을 극복해 온 니체는 "나는 병에서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병으로 인한 고통에서 더 높은 건강, 더 나은 철학을 얻었고 고통이 자신을 심오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니체가 말하는 병은 우리가 생각하는 질병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병은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고 삶이 고착되어 버린 것을 말합니다. 건강이란 같은 행동과 생각을 반복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삶에 반기를 들고 변신의 잠재력으로 몸이 들끓는 상태를 말합니다. 새로운 탄생을 위한 힘의 의지가 넘치는 삶이야말로 건강하며 가치 있는 삶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극복의 힘으로 넘치는 삶이야말로 니체 철학의 정수입니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세상을 힘들의 바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힘을 발휘하기 위한 의지들이 넘치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가 반복되는 곳입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그 순간에 어떤 생명은 죽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움직이며 하나로 고정되어 멈춰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착되지 않은 새로움들이 영원히 반복해서 일어나는 모순된 생성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 세상이여, 너무도 뻔뻔하고 사악하구나!

기르고 가르치면서 또한 죽이기도 하니.

 

이란의 시인 피르다우시(Firdawsi)의 표현처럼 세상은 뻔뻔하고 사악합니다. 생명을 낳고 기르고 가르치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 생명을 죽이는 것 또한 세상입니다. 이런 잔인하고 모순적인 세상에 대해 우리는 자주 환멸을 느낍니다. 붓다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고통과 달리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저절로 움직입니다. 이런 모순적인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자기만의 논리로 설명하는 사람들입니다. 니체는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 이 사람을 보라 >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과 축제의 신입니다. 어린 시절 디오니소스는 거인들에 의해 온몸이 찢겨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되살아납니다. 디오니소스는 죽음을 통해 다시 살아난 신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재탄생합니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다르고 일 년 후의 내 모습은 지금과 다릅니다. 한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갑니다. 마치 디오니스의 죽음과 탄생처럼.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영위합니다. 소멸과 죽음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며 우주적 원리일 뿐입니다. 그 원리를 품고 다시 탄생하는 것이 삶입니다. 사자가 토끼를 잡는 것이 사자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의 방식일 뿐입니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죽이고 새롭게 탄생합니다. 죽음과 삶은 하나이며 그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역동적 작용입니다. 우리 자신 또한 단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습니다. 세포가 멈춘 순간이 있을까요? 쉼 없이 생성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지독한 인정, 지금의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힘에의 의지가 디오니소스적 긍정입니다.

 

니체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대비시킵니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으로 밝음, 질서를 상징합니다. 밝음과 질서는 인간의 이성을 대변하기도 하죠. 이성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져다줍니다. 디오니소스적 방식은 예술에 가깝습니다. 고착된 것을 경멸하고 죽음을 긍정하면서 새로운 생성을 염원하며 도취와 황홀, 광기를 불러들입니다. 기존의 도덕을 위반하는 쾌감을 통해 새로운 탄생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예술가들의 작업과 유사합니다. 아폴론이 수학과 과학이라면, 디오니소스는 예술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은 기존의 도덕과 금기에 도전합니다. 아니 무시합니다. 도덕과 금기는 노예적 삶의 산물입니다. 생명은 긍정과 능동의 넘치는 힘으로 금기를 넘어 자유와 도취에 이르려 합니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은 망치에 비유됩니다. 기존의 것을 깨부수는 망치, 새로운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망치, 다른 미래를 위해 현재를 파괴하는 망치가 니체의 철학이고 그 무한 반복에 대한 긍정이 디오니소스입니다.

 

안상헌 / ‘미치게 친절한 철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