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존재란 무엇인가

송담(松潭) 2022. 9. 19. 16:55

존재란 무엇인가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 독일)

 

 

우리는 흔히 무엇이 존재한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것이 '이 세상에 있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이 존재를 잘못 다루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그동안의 형이상학을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왜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존재 질문'이라고 합니다.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질문이죠. 왜 세상에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요? 하이데거에게는 있음이라는 사태, 존재라는 현상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과제였습니다.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는 현상학을 위해서 하이데거는 먼저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합니다. 존재자현실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말합니다. 나무, 책상, 건물 그리고 이 책을 보는 나 자신이 존재자입니다. 반면 존재는 존재자의 근거입니다. 존재자를 존재자일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것이죠. 그동안의 형이상학은 '있음(존재)'을 '있는 것(존재)'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할까요?

 

실존, 인간의 숙명

 

인간 또한 존재자입니다. 그런데 존재자인 인간은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인간이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구분됩니다. 이런 인간의 독특한 면을 하이데거는 '현존재(現存在)'라고 부릅니다. 현존재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인간을 다르게 취급하는 이유는 그래야 인간이 가진 존재론적 의미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존재가 드러날 수 있는 실마리를 품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존재를 탐구하면서 인간을 중심에 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자신이 왜 사는지,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삶의 이유와 존재의 의미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고 현존재라는 이름을 붙여서 다르게 사유하려고 합니다. 이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는 특별한 태도를 '실존(實存)'이라고 부릅니다. 실존은 현존재가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숙명에 처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자연이 던진 돌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말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자입니다. 자신이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눈을 떠 보니 세상에 던져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던져진 인간은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이유를 묻습니다. 그것이 다른 존재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이 처한 운명이기도 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이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받은 사르트르는 이것을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 재정리합니다. 인간은 태어난 목적보다 먼저 존재한다.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지구라는 땅에 던져진 존재자입니다. 이것을 하이데거는'세계-내-존재'라고 표현합니다. 굳이 하이픈(-)까지 넣으면서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인간임을 강조한 것은 그것이 인간이라는 현존재의 실존을 잘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어떤 상황 속에서 존재합니다. '2019년 3월 5일 대한민국 서울 강남역 2호선 입구'라는 특정한 상황이 현존재의 위치입니다. 그가 자리를 옮긴다고 해도 특정한 상황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현실이며 '세계-내 - 존재가 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전통 형이상학과 하이데거의 철학이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전통 형이상학은 보편적 인간을 파악하려 시도합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와 같은 규정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근대철학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자로 파악하고 이성의 능력을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계몽주의가 그것을 잘 보여 주고 있지요. 이런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이 발달할수록 더욱 자유롭고 행복해지며 세상 또한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헤겔의 절대정신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이성이해 놓은 것들을 보면 고개를 가로젓게 됩니다. 전쟁과 학살, 차별과 분쟁, 부패와 범죄 등 온갖 문제로 전 세계가 시름하고 있으니까요.

 

하이데거는 이런 철학적 전통을 문제 삼습니다. 인간을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존재자로 파악하려고 했기 때문에 존재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상황에 직면해 있는 존재자인데 어떻게 추상적인 개념으로 환원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현재라는 구체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이야말로 철학이 해명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것이 하이데거에게는 현상학이었고 실존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존재와 시간

 

우리 삶을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가 갑니다. 단 하루도 염려나 걱정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 걱정, 돈 걱정, 노후 걱정, 자식 걱정. 이런 염려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죠. 인간의 본질 자체가 염려입니다. 게다가 이런 인간의 삶은 시간을 배경으로 이루어집니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시간입니다. 인간의 운명을 판결한 것은 시간을 의미하는 사투르누스였습니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가 다른 모습입니다. 미래 또한 다르겠지요. 과거에 사로잡히고 미래를 염려하며 현재를 불안해하는 것이 인간 실존의 모습입니다. 시간은 인간 존재 출몰의 근원이자 배경이며 장(場)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주저의 제목이 <존재와 시간>입니다. 1

 

존재를 불러오는 근본기분, 불안

 

어느 날 급습하는 불안은 우리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이 불안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인간은 시간이라는 배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태어나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시간을 누비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 도달하게 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죽음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옵니다. 존재가 사라지는 현상이기에 인간에게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존재자에게 죽음은 무엇보다 낯선 것이고 그것이 불안을 가져옵니다. 있음이 없음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불안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근본기분'이라고 말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이 찾아올 때 우리는 세속적인 삶의 가치들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아등바등 사는 하루가 의미 없고 그동안 쌓아 왔던 부와 지위가 덧없는 것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세속적 가치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를 새롭게 바라볼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경이’라는 기분입니다. 죽음의 불안이 주는 근본적인 기분을 통해 세속적인 것들이 허무함을 알게 되면 존재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때는 그동안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되고 존재 자체에 대해 감사해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주변의 존재가 빛을 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찾아온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은 열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직시하고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자각할 때 이전과는 다른 결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단은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향하는 문입니다. '인생이 얼마 남지않았을 때 사람은 가장 자유로워진다'는 영화 <버킷리스트>의 대사처럼 죽음을 앞둔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곧 죽을 사람은 못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과 경이로운 존재의 길로 들어서는 경험입니다. 그 순간 세상 전체가 경이로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어야 인간답게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의 노예로 살아가지만, 일과 동료를 경이로 대하는 사람들은 일과 관계가 즐겁고 삶이 충만해집니다. 이 차이는 너무 커서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지요. 인간은 존재적 충만을 확보하지 못할 때 공허한 삶을 채우기 위해 다른 것들을 기웃거립니다. 하이데거가 근대철학이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말한 이유가여기에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출정한 장군이 승리해 돌아올 때 그의 노예 중 한 명을 보내 이렇게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에게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을까요? 승리에 도취해 자만심에 빠질까 봐 염려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죽음을 떠올리면 숙연해집니다. 그 숙연함이 현재를 소중한 것으로 만들고 삶과 존재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해줍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

 

존재의 경이를 목도하는 또 다른 길은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언어에 있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그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언어는 철학자나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은 아닙니다. 사물의 개념을 설명하는 이성적 언어들은 사물을 경계 짓고 개념을 한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언어들은 오히려 존재의 의미를 가립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중에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가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본 사람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사과를 그려 놓고 제목을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고 했으니까요. 조금 생각을 비틀어보면 이해가 됩니다. 사실 마그리트가 그린 것은 사과가 아니라 사과의 그림입니다. 사과와 사과의 그림은 다르죠. 그런데 우리는 사과의 그림을 보고는 사과라고 말합니다. 말도 마찬가지죠. ‘오늘 사과를 먹었다'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사과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지 사과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는 말이나 그림을 통해 의사소통을 합니다. 말과 그림은 사물 자체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도구적 언어 사용'이라고 합니다. 하이데거는 이런 도구적 언어 사용의 문제를 꼬집습니다. 일상의 편리를 돕는 언어가 뭐가 문제냐고요? 지시적이고 도구적인 언어의 사용으로 인해 존재 자체가 묻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친하게 지내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표현은 그 사람의 어떤 부분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규정지음으로써 오히려 그의 다른 면들,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감춥니다. 언어가 존재를 제약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보도 존재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도구적 언어 사용으로는 존재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 자체가 소용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잘못된 언어의 사용이 존재의 의미를 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세상을 규정짓고 수용합니다. 그런 후 자신의 의식 속에서 대상들을 정리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재탄생시켜 나갑니다. 이를 통해 자기 삶을 창조적인 것으로 꾸밀 수 있게 되죠. 결국 인간 문명은 언어를 사용해 세상을 이해하고 유용한 지식을 생산해 내 필요한 것을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언어가 없다면 그 작업은 불가능하며 인간 존재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존재를 인식하고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자기를 탄생시킬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인 것이죠.

 

그럼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 혹은 시작(詩作)입니다.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등 수많은 철학자가 예술을 강조했습니다. 예술이 개념적 언어가 포착하지 못한 궁극적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문임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의 본질은 시'입니다. 시는 시를 짓는 일을 포함한 예술적 창작 행위를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개념들이 모여 지식이 되고 사유가 됩니다. 어떤 것에 경계를 긋고 그것에 이름 짓는 일이 개념을 만드는 작업이죠 일반적인 언어와는 달리 시는 개념을 한정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념을 넘어섭니다.

 

함민복 시인의 <섬>이라는 시입니다.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우리는 섬을 물로 둘러싸여 갇힌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섬을 둘러싼 바다가 울타리고 울타리가 모두 길이라고 말합니다. 울타리는 내 것과 네 것을 경계 짓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울타리가 길입니다. 바다가 길인 셈입니다. 갇힌 섬이 아닌 열린 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시는 기존 관념을 무너뜨립니다.

 

시의 힘은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기존과 다른 시선은 새로운 발견, 깨달음을 줍니다. 그런 깨달음은 우리에게 경이를 선물하죠, 그런 의미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새로운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고 존재의 의미를 경이로 대하는 일입니다. 

 

하이데거 시간을 마쳐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가 그토록 천착했던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그에게 존재란 그것이 가진 고유한 본질과 아름다움 혹은 성스러움을 뜻합니다. 강은 강의 본질이 있고, 닭은 닭의 본질이 있고, 인간은 인간의 본질이 있습니다. 존재자를 그것일 수 있게 하는 어떤 것이 곧 존재입니다. 각자의 본질에 충실할 때 우리는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굽이쳐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끊임없는 자연의 흐름에 숭고를 경험합니다. 마당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닭을 보며 생명의 신비와 질서에 경이를 느낍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뒤로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모험의 세계로 뛰어든 젊은이를 보며 그의 결단과 용기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이 모든 순간이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존재를 만날 수 있고 또 만나야 합니다.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위해서.

 

안상헌 / ‘미치게 친절한 철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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