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소유를 넘어 존재하는 삶

송담(松潭) 2022. 8. 3. 11:35

소유를 넘어 존재하는 삶

에리히 프롬의 < 소유냐 존재냐 >

 

 

 

길을 가다가 예쁜 꽃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꺾어서 집으로 가져와 화병에 담는 것입니다. 집안이 화사해지고, 꽃을 집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은 꽃은 곧 시들어버릴 겁니다. 이것은 '소유 중심의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꽃을 감상하고 향기를 느끼며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을 함부로 다루지않고 아낍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함을 긍정하는 '존재 중심의 삶'입니다.

 

우리는 소유하는 삶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무척 피곤합니다. 끊임없이 가질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요구는 끝이 없고, 끝이 없는 욕망을 좇는 것은 고통을 불러옵니다. 모든 괴로움의 근원에는 소유가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내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그런 실존양식을 의미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소유에서 벗어난 능동적인 삶

 

소유와 존재의 문제는 사람 관계에서도 중요합니다. 소유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람을 소유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면 불편해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갈등이생기고 다툼까지 일어납니다.

 

존재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친구 관계도 원만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기 때문에 다툴 일이 없습니다. 성급하게 끝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며 기다릴 줄 알기 때문에 오래 사귀어도 변함없이 든든합니다. 고전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존재냐>는 자기도 모르게 소유 중심으로 살고 있는 모습을 깨우치게 해줍니다. 그 덕분에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성찰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존재적 삶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요? 에리히 프롬은 능동성이라고 말합니다. 수동적인 사람은 방어적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돈과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위험을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능동적인 사람은 개방적입니다. 가지지 않아도 괜찮고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소유보다 나눔에 익숙합니다.

 

소유는 집착을 낳고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배려와 나눔은 상대방을 개방적으로 만들고 서로에게 긍정적 자극을 주어 결과적으로 더 많은 것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은 나에게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베푸는 만큼 돌아오는 것이 삶입니다.

 

천고의 긴 시름 씻어 버리고

연이어 백 동이의 술을 마시네

좋은 밤이라 이야기 나누기 좋고

밝은 달은 잠 못 들게 하네

술에 취해 적막한 산에 누우면

하늘과 땅이 곧 이불과 베게일세

 

- 이백의 '우인회숙(友人會宿)'

 

이백의 한시는 좋은 벗과 맘껏 즐기는 삶의 흥취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활짝 열린 마음으로 온 세상을 큰 집으로 여기는 자유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맹자는 이것을 호연지기라고 했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호쾌한 마음이 곧 능동적 태도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안상헌 / 작가, <미치게 친절한 철학> & <생산적 책읽기>의 저자

(출처 : 공무원 연금 2022.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