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아일랜드의 초원을 바라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성한 푸르름이 그랬고 텅 빈 쓸쓸함이 그랬다. 그 들판은 천하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비바람을 견디며 풀들은 이리 눕고 저리 누웠다. 초원은 마치 바닷 물결 같았다. 나를 태운 자동차는 푸른 지평선을 가로지르듯 나아갔다. 한 자라도 대지의 맨살이 드러난 곳은 없었다. 경이로운 녹색의 향연이다. 풍경이 흘러와 마음에 스며든 한나절, 낯선 자연은 그렇게 내 몸속에 가두어졌다. 길은 본래 주인이 없는 것. 내가 그 길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지나온 모든 위치가 무효인 듯 황홀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내 인생에서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연극이었다. 이 작품연출가 임영웅(극단 산울림)은 이 노벨상을 받은 1969년에 국내 공연을 시작했다. 무려 40년 동안 2,000회를 넘겼으니 베케트의 고향 아일랜드 초청공연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연극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진행 중이다. 30년 전 대학로에서 봤던 기억이 아스라해질 무렵 홍대 앞에서 다시 만났다. 임영웅. 그도 어느덧 80대를 넘겼다. 베케트가 그랬던 것처럼 고도를 기다리며 오늘도 달리고 있다. 두 사람은 더블린에서 내내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언덕 밑에서 늙은 두 방랑자(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가 '고도 godo'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 시작된 게 아니다. 그들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디로 온다는 것인지, 왜 기다리는 것인지도 잊었다. 그저 습관처럼 지루한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지독한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 서로에게 욕하고 질문하고, 회상하고, 싸우고, 장난하고, 춤추고, 운동한다. 그렇지만 고도가 오면 이 지루함이 끝난다는 희망 속에 둘은 끊임없이 말을 이어간다. 그들의 상황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것은 고도가 아니라 그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갖고 오는 소년이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
아무것도 일어난 게 없었고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가지 않았다. 기나긴 공연만이 막을 내렸다. 공연이 진행되는 3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끝난 뒤로는 다른 이들처럼 얼른 일어설 수도 없었다. 기억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다만 그 순간 내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고도라는 낯설지 않은 한 인간이 오랫동안 자신의 절망을 고백하는 모습을 골똘히 지켜본 묘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은 시간이었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이미 약속은 수없이 지켜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미 와있는 고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영원히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늙고 가난한 두 광대는 서로를 껴안다가 이내 밀치며 상대의 악몽을 깨워주면서도 그 꿈 이야기만은 듣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처연하다. 이제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니 그만 헤어지자고 돌아서지만 서로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늙어가고 있다. 시간처럼 무겁고 시간처럼 손쓸 수 없이 흩어지고 마는 모래를 가방 가득 들고서 황량한 언덕을 헤맨다.
잉글랜드의 오랜 압제에 대항하며 꿈을 키웠던 더블린 시내 리피 강변을 돌아 600년의 역사를 가진 트리니티 대학으로 들어섰다. 베게트가 고뇌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던 현장이다. 롱 룸Long Room 도서관은 영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도 아닌 아일랜드 모국어(게일어) 저작들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더블린 문학관과 베게트 다리를 오가며 석양을 보냈다.
수없는 사람이 살아생전 “고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베케트에게 던졌다. 그는 끝내 함구했고, 이승을 떠나기 전 이렇게 이야기했다. “좀 모자랄 때 나는 만족한다. 충분히 이해는 안 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모른다. 등장인물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그들에게 물어보라.” 이에 나는 자문했다. '고도를 왜 기다리는가?'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기다리는 것 아닐까.
다음 날 새벽 다시 가본 베케트 다리 아래는 어제처럼 강물이 느리게 흐르고 어제와 같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1930년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베케트는 청년시절 고국을 떠나 파리에서 살았고 레지스탕스에도 참여했다. 프랑스어로 작품을 집필하면서도 게일어를 잊지 않았다. 고도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아름답게 들여다보고자 했다. 은둔, 죽음,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종착역의 사람들을 그렸다. 되는 게 없는 주인공 Noting to be done들을 사랑했다.
인생에서 고도는 누구인가. 보통 신이라든가 희망, 자유, 미래, 죽음 등으로 해석하기는 하지만 정답은 없다. 삶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고 막연히 그려볼 뿐이다. "내 인생이 낯선 곳을 향해 저물고 있구나, 잘못되어가고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누더기를 걸치고 이 희곡의 텅 빈 무대 위로 던져진다. 고도가 오지 않는 대신 여름날 홍수처럼 어둠이 덮칠 것이다. 죽음 같은 침묵 속에 쌓여 움직이려 해도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내일을 맞을 것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줄거리도 없고, 해결할 것도 없는 일상을 위하여, 이것이 인생일지니. 미국 생퀸 교도소의 무기수들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이 공연을 했고 특사로 풀려난 뒤에도 그들은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예술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베케트를 만날 때마다 나는 처절한 논리의 실종을 맛보아야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 연극이다. 허무, 절망, 결여, 부정, 실패, 상실, 망명, 추방과 같은 언어의 뒷마당에 던져진 술병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 그런 인간들을 그린 그림이다. 예술은 인간의 결핍을 노래하는 것이다. 못 보는 것을 꺼내어 듣고 보고 소통하게 한다. "이 작품은 빈곤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기쁨을 준다. 기다림이라는 미학으로(노벨상 결정 이유)” 정신적 빈곤 시대에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에게 베케트는 위대한 선물 '고도'를 주고 떠났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게 되면 내 삶에 소홀해질 수 가 없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때 당황하게 되며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세계가 감옥이란 것을 알았다”라는 것이 베케트의 고백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이 연극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고 더 나은 실패를 하라.” 이러한 그의 유언까지도 의미 있게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더블린 뒷골목의 템플 바에서 스코틀랜드 위스키 한잔을 걸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영화처럼 잠깐 떴다가 사라지지 않고 오래된 연극처럼 내일도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계속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그치지 않고 가는 것이 아니던가.
김경한 /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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