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송담(松潭) 2021. 7. 4. 16:31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프라하는 동유럽의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인 체코의 수도입니다. 프라하는 낮에 보면 활기찬 분위기라서 놀이동산의 한모퉁이에 와 있는 느낌을 줘요. 도시가 오래되었지만, 관광객들의 밝은 움직임이 도시 전체를 통통 튀게 만들죠. 활짝 열린 3층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방구석 음악회 같은 연주도 많아서, 공기 중에 음표가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즐겁습니다. 서유럽의 살인적인 물가에 시달리다가 동유럽에서 만나는 친근한 가격표들을 보면서 이런 느낌이 더 배가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밤에 보는 프라하는 모습이 확 바뀐 여성이랄까요. 낮에는 멜빵바지를 입은 명랑한 말괄량이 아가씨가 밤이 되자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 입고 파티에 참석해 아름다움을 뽐내는 느낌입니다. 밤이 내려앉은 프라하는 낮과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줍니다. 장중한 어둠이 고색창연한 건물들 사이로 속속 스며들어 그야말로 1년 내내 밤만 지속되는 나라에 온 것 같아요. 충분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은 가로등은 어둠을 이겨낸다는 생각보다는 어우러진다는 느낌으로 프라하의 밤을 채워줍니다. 어떻게 보면 음침하고, 다르게 보면 품위 있으며,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특별한 아우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프라하의 밤입니다.

 

낮의 경쾌한 밝음과 밤의 장중한 어두움이 기가 막히게 공존하는 곳이 프라하인데요. 이 프라하를 닮은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 역시 프라하예요. 많은 분들이 한 번쯤은 제목을 들어봤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이 책을 처음 읽고는 별 느낌을 받지는 못했어요. 제목도 그렇고, 전개도 그렇고 철학책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이 소설이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로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이해가 안 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니 뭔 줄거리가 있어야 영화화될 텐데 말이야' 하면서 말이죠.

 

이 소설 자체가 가벼움과 무거움의 이분법 위에 쓰여 있거든요. 그리고 이에 대한 은유도 너무나 명확해요. 우리가, 그러니까 인간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가져야 하는 자세가 두 갈래 길이라면, 그 두 갈래 길은 이 가벼움과 무거움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무거움은 책임감, 의무, 필연 등과 연결되고 가벼움은 즐거움, 자유, 우연 등과 연결됩니다.

 

이 소설에는 4명의 핵심 인물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토마시와 테레자가 있고요, 서브 주인공들인 사비나와 프란츠가 있습니다. 토마시와 사비나는 가벼운 나라의 이상한 사람들이고,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운 나라의 심각한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가벼운 인물들인 토마시와 사비나가 연인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토마시와 테레자가 연인이라는 것이죠.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다

 

주인공인 토마시가 테레자를 만나기 전까지 지켜왔던 "섹스는 하되 동침은 하지 않는다"는 모토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잘 보여줍니다. 동침은 곧 애정과 책임이고요, 애정 없는 성관계는 가벼움이거든요. 그러니까 토마시는 무거운 책임감이나 의무는 싫고 가볍게 즐기는 삶을 원하는 것이죠.

 

반면 토마시를 처음 만났을 때 고전소설인 「안나 카레니나」를 들고 있던 테레자는 무거운 세계의 인물입니다. 토마시는 태레자와 함께 부부와 유사한 관계를 형성하는데도, 여전히 다른 여자들과 잠자리를 합니다. 책임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일부러라도 그런 기회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테레자는 결혼의 신성한 의무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주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토마시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참아내요.

 

어떻게 생각하면 무거운 테레자에게 가벼운 토마시의 행보는 매력을 느끼게 하는 요소일 수 있어요.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끌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반면 가볍게만 살던 토마시 역시 테레자의 무거움에 끌리게 됩니다.

 

소련군의 체코 침공이 일어나면서 토마시와 테레자는 스위스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토마시는 바람기를 참지 못해요. 결국 이에 화가 난 테레자는 토마시를 떠나 혼자서 소년군 치하에 들어간 프라하로 돌아가버려요. 토마시는 테레자의 뒤를 쫓아 프라하로 돌아가지요. 문제는 의사인 토마시가 예전에 공산당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기 때문에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공산당은 토마시에게 에전에 쓴 신문기사를 취소하라고 압박을 가하지만, 토마시는 그러고 싶어 하지않아요. 공산당은 프라하로 돌아온 토마시에게 새로운 직업을 부여합니다. 잘나가는 외과 의사에서 유리창닦이로 하루아침에 직업이 바뀌어버리지요.

 

이렇게 보면 인생을 즐기면서 가볍게만 사는 줄 알았던 토마시에게도 진중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위협을 무릅쓰고 테레자에게 돌아가고, 자신이 쓴 기사에 책임을 지며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니까요.

 

한편 사비나는 한때 토마시의 연인이었죠. 사비나 역시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인데, 이런 태도가 가정이라는 책임감에 충실했던 프란츠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프란츠와 사비나는 불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사비나는 자신이 책임질 일이 전혀 없는 이런 관계가 좋기만 합니다. 프란츠가 그의 아내에게 연인인 사비나를 공개하는 순간 사비나는 프란츠를 떠납니다. 그녀는 사랑이 주는 책임감, 그 무거움을 참지 못했지요.

 

프란츠는 사비나가 떠나고 대리만족을 위해 안경잽이 학생과 연인 관계를 지속하다가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외국에 가는데, 거기서 강도를 만나 죽습니다. 반면 사비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자유롭게 가벼운 삶을 영위하죠.

 

한편 토마시와 테레자는 결국 시골로 가서 살다가 거기서 교통사고로 죽고 맙니다. 제일 마지막에 토마시와 테레자는 같이 춤을 추는데 테레자가 말하죠. 당신 인생에서 모든 악의 근원은 나라고, 자신의 무거움이 가볍게 인생을 즐기는 토마시를 이 시골까지 끌어내린 거라고요. 그런데 토마시는 자신은 지금 행복하다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하지만 정작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그다지 홀가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책을 다 읽고도 '도대체 뭐라는 거야?'라는 기분을 떨쳐내기가 힘들기 때문이죠.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선택이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을 던집니다. 인생은 즐거운 것일까요, 괴로운 것일까요. 그 답은 개인의 환경과 경험에 따라 다 다를 겁니다. 하지만 인생의 모습을 자신이 온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행복도를 결정하는 것은 실제 우리를 둘러싼 환경보다는, 그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인 것 같아요. 인생을 가볍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무겁게 사는 것이 불행한 것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불행한 환경을 마음으로라도 이겨내는 가벼운 태도, 쾌락만 추구하는 사회에서 중심을 지키는 진중한 태도 등은 삶의 밸런스를 맞추는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닐까요?

 

찰나의 무거움과 영원의 가벼움

 

하지만 이 소설을 단순히 인생을 대하는 가벼운 태도와 무거운 태도의 선택과 집중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만 읽는다면 이 소설을 다 읽고도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심화된 문제를 떠안은 것 같은 느낌이 들 겁니다.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소설이 사실 철학적 논제를 바탕으로 창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제일 앞에 그 문제를 던져놓고 시작합니다. 바로 니체의 '영원 회귀'입니다. 영원히 회귀한다는 것은 무한대로 반복되는 것이죠. 이렇게 무한대로 반복되는 삶은 당연히 무겁고, 한순간 피었다가 지는 인생은 반대로 한없이 가볍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가벼움이나 무거움, 한쪽으로 쏠린 사회는 결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1920년대 미국처럼 파티와 쾌락의 즐거움이 가득했던 가벼운 시대도 있었지만 그 결과는 대공황이었어요. 그리고 종교가 웃음까지 지배했던 중세시대의 무거움은 결국 개혁으로 뒤집어졌습니다. 인생이 무겁다거나 가볍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층위를 이루고 있는 사회 또한 단정 지울 수 없습니다. 사회는 이렇게 무거운 사람들과 가벼운 사람들이 섞여 만들어내는 총합이니까요. 때로는 한쪽으로 쏠려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개인이 가진 다양성을 인정하고 적절하게 밸런스를 맞춰가며 평형을 잡아가는 사회가 조금 더 바람직한 사회일 겁니다.

 

인간은 사회를 이뤄가며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 시대들이 켜켜이 쌓여 이루어지는 역사는 무한 반복되며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닌 나라는 개별체로 보자면 한번 살고 가는 가벼운 인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인생은 그 무거움과 가벼움이 합쳐져서 존재하는 거거든요. 아름다움이나 찬란함은 그것이 한순간이어서 빛나는 것이지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 의미가 퇴색될 겁니다. 역사나 시대라는 무거움 앞에 인간은 한번 살고 간다는 가벼움의 미학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단 한 번뿐인 인간의 인생은 무한반복의 역사 앞에서는 한없이 가볍지만, 그 가벼움 때문에 인생이 아름다운 게 아닐까요? 가벼움과 무거움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이 있어 더 의미가 있습니다.

 

이시한 / ‘지식 편의점(흐름출판)’중에서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블린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0) 2021.11.06
놀이하는 인간  (0) 2021.09.12
시간  (0) 2021.01.13
니체의 영원회귀  (0) 2020.12.19
내가 나비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인가  (0) 2020.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