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14년, 애덤스 20년
1653년, 효종 4년 시기에 은둔국이었던 조선 땅으로 낯선 이방인들이 밀려 들어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하멜 일행 36 명이 제주도에 표류한 것이다. 풍랑에 부서진 스페르베르호는 제주도 대정 해안에 좌초했다. 선원 가운데 반은 죽고 나머지가 간신히 뭍으로 살아 올라왔다. 제주 목사 이원진은 한양에서 내려온 박연(벨트브레)의 통역 도움으로 조사를 마치고 10개월 만에 이들을 한양으로 올려보냈다. 조선 조정은 네덜란드인들을 훈련도감, 금군에 배치했다. 덩치가 좋고 화포를 잘 다루는 특기를 살린 것이었다. 하지만 청나라가 이 사실을 눈치챌까 봐 조선은 전전긍긍했다. 사신단이 올 때마다 하멜 일행을 가두거나 남한산성 등지로 피신시키고는 했는데 마침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1655년 일행 가운데 두 사람이 청나라 사신단에 뛰어들어 자신들을 나가사키에 보내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조정은 이들이 한양에 있는 한 관리도 어렵고 언제든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임금은 하멜 일행을 부안과 강진에 분산 수용하도록 명령했다. 전라도로 옮겨진 이들은 잡초를 뽑거나 새끼를 꼬는 잡역에 동원되었다. 1666년 7월 나가사키로 탈출하기까지 11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냈다. 하멜은 니가사키에서 휴식을 취한 뒤 원기를 회복해 바타비아(자카르타)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쓴 <하멜 표류기>는 서양사회에 조선을 알리는 최초의 기회가 되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큰 시간이었다. 하멜 일행은 화포를 만들거나 조총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 항해술은 물론 네덜란드가 일본과 벌이는 무역정보까지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 부분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키 크고 이국적인 외모를 지녔다는 이유로 사대부집 잔치마당에 불러다 분위기 띄우는 바람잡이 역할을 시키거나 임금행차 호위병으로 차출되어 백성들의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쳤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53년 전인 1,600년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호가 일본 규슈의 분고 앞바다에 표착했다. 본래 에라스무스호라고 불렸던 리프데호는 1598년 동방무역을 위해 로테르담을 출항한 5척의 선단 가운데 한 척이었다. 전국시대 혼란한 천하를 통일하고 이 소식을 접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직접 배를 보내 이들을 불렀다.
영국인 출신 항해장 윌리엄 애덤스가 쇼군과 직접 면담에 나섰다. 포르투갈어 통역으로 이뤄진 자리에서 이에야스는 애덤스에게 네덜란드 선박의 항행 이유와 유럽의 정세 등을 질문했다. 이미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조총을 전수받은 일본에는 선교사와 상인들이 상당수 들어와 있던 때였다. 이들은 규슈 서남부 항구도시 나가사키에 설치된 특별거주지역 데지마出島에 살도록 배려받았다. 당시 일본의 지배층은 애덤스 일행 때문에 가톨릭이 성행할 것을 우려해 처형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생각은 달랐다. 애덤스가 뛰어난 조선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정세에 밝은 면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애덤스를 외교 자문역으로 임명했다. 언제든지 이에야스와 대신들을 접견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대우도 받았다. 마음을 연 애덤스는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해 영국,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역을 알선했다. 애덤스는 12살 때부터 런던 근처의 조선소에서 13년을 일했다. 드레이크 함대 소속 함장으로서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투에도 참가한 베테랑 '바다 사나이'였다. 1605년 애덤스가 본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지만 이에야스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미우라 지역(현재의 요코스카)에 250석의 영지를 하사했다. 사실상의 영주 대접을 한 것이다. 이에 감격한 애덤스는 귀화를 선택하고 일본 여인과 결혼해 정착했다. 20년을 일본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일본인들은 그를 미우라 안진三浦安針이라 불렀다. 삼포(미우라)에 영지를 가진 항해사라는 뜻이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애덤스는 정성을 다해 120톤짜리 범선을 제작했다. 일본인들은 이 배를 타고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해 멕시코까지 항해했다. 막부의 사무라이 유적이 멕시코에서도 발견된 이유다. 이후 나가사키 데지마에 설치된 상관(商館)을 통해 일본은 네덜란드와 활발한 교역에 나섰다. 중세 일본의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애덤스 일행은 일본과 유럽을 연결하는 가교였다. 여세를 몰아 일본은 국제 감각도 키워나갔다. 데지마를 중심으로 일본사회는 네덜란드 연구를 일컫는 '난가쿠’가 크게 유행했다. 유럽의 선진문물을 익히는 통로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난학의 거두였다. 그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일본의 미래가 있다며 개항에 앞장섰다. 게이오 대학을 세우고 웹스터 사전을 번역해 영어를 보급했다. 이 같은 노력은 일본이 세계열강의 일원으로 올라서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데지마는 나가사키역으로 가는 대로변에서 작은 아치형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미쓰비시 조선소 맞은편 항구 중심지에 자리 잡은 소규모 인공섬이다. 주요문화재로 지정된 데지마는 일본의 근대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부채꼴 모양의 매립지에는 그 시절 사고팔던 상품과 네덜란드인들의 생활 유품들이 보존 공개되고 있었다. 두 나라의 깊은 인연은 '하우스 텐포스(네덜란드 마을)’ 건립으로 이어져 아직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풀을 뽑다가 탈출한 하멜과 영주 대접을 받은 애덤스의 차이가 근대 한국과 일본의 운명을 바꾼 것은 아닌지.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남을 인정하는 전략적 포용이 국가의 100년을 좌우했다. 리더의 시각은 역사를 바꾸는 바로미터다. 무지와 당쟁의 한계를 벗어나야 조선의 시야가 넓어졌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좁은 우물 안에서 서로 기어오르려고 밟아봐야 상대의 머리를 밟고 다시 추락하고 만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 우리의 국제 감각과 역사 인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안에서 싸우지 말고 바깥세상과의 경쟁에 열중해야 국가의 미래가 있다.
김경한 /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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