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기억, 히젠토
사진출처 : 컨슈머타임스
조선의 황후 민자영은 일본 사무라이 칼에 찔려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 야심 차고 지적이던 한 나라의 왕비가 낭인들에게 무참히 난자당한 사건은 세계사를 다 뒤져도 찾아보기 어렵다. 을미사변이라고 칭하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발단으로 조선과 일본은 피로써 피를 씻는 비극적 관계가 시작되었다. 궁궐 한가운데서 황후를 찌르고 시체를 옆 숲속으로 끌고가 불태운 만행은 나라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물어야 할 국가적 질문이다.
소설가 이문열의 희곡 <여우사냥>을 토대로 만든 뮤지컬 <명성황후>를 마지막까지 차마 다 보지 못한 기억이 있다. 나는 지금도 그녀의 한을 노래한 소프라노 조수미의 <나 가거든>을 자주 듣는다. 청각으로 꽂히는 지극한 슬픔은 분노보다는 우리가 더 강해져야 한다는 의연함을 품게 한다. '여우사냥'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작전명이다. 국모를 찌른 칼, 히젠토 칼집에는 번개처럼 일순간에 늙은 여우를 베다라는 뜻의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사건에 가담한 56명의 낭인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토오 가쓰야키는 이 끔찍한 범행을 잊고 싶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칼 히젠토를 절에 맡기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보관을 요청했다. 인간이었기에 참회하는 마음이었을 거라 추측할 뿐이다. 미우라 공사 외의 가담자 여럿은 잠깐 히로시마 구치소에 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전원석방되었다. 일본이 꾸민 짓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구시다 신사의 붉은색 정문은 교토의 분위기를 연상하게 했다. 넘치는 붉은 색감이 토속신앙을 믿는 그들의 경건함이 느껴지기보다 오히려 시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후쿠오카의 명물 캐널시티를 끼고 걸어서 금방 구시다에 이르렀다. 겨울 하카다는 맑고 청명했다. 신사 관계자들에게 히젠토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다. 10여 년 전까지 일반에 전시되었던 칼을 거둬들인 것이다.
여주 민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15살 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흥선대원군이 외척세력을 만들지 않으려고 잘 알려지지 않은 가문의 고아 소녀를 중전으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흥 민씨는 원경왕후(태종)와 인현왕후(숙종) 등 유명한 왕비를 배출한 노론의 명문가다. 명성황후의 증조부와 조부는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지냈고 그 덕에 부친은 음서로 벼슬자리를 얻어 종4품까지 올랐다. 안동김씨나 풍양 조씨보다는 못했지만 조선에서 이 정도면 세도가 당당한 집안이었다.
1873년 고종 집권부터 난국을 바로잡고 조정을 일신하기 위해 1894년 김홍집 내각을 수립할 때까지 고위직을 자치한 민씨 일가는 51명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모친과 부인도 여흥 민씨였다. 구한말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명성황후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팽창하는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불러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러시아로 일본을 견제한다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이 어지럽게 떠돌던 시대였다.
“명성황후의 눈은 차고 날카로웠지만 매혹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으며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였다.” 구한말 조선의 상황을 유럽에 처음 알린 영국 출신 여류작가 이사벨라버드 비숍이 남긴 명성황후의 모습이다. 사건의 총책임자였던 미우라조차도 “조선의 국모는 지나치게 총명하고 정치적이어서 위험한 존재”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때 우리는 구시다 신사에 보관 중인 히젠토를 한국으로 반환시켜 폐기하고 일본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세우자는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지속적이지 못했고 지금은 조용하다. 많은 일본인은 구시다 신사에 이 같은 슬픈 역사의 도구가 숨겨져 있는 줄 모르고 들어오는 것 같다.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를 염원하는 일본인들의 간절한 기원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가끔 보이는 한국 관광객 중에는 신사 앞에서 두 손을 모으는 이도 있었다. 히젠토의 과거를 알고 하는 행동인지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뿐이다. 이 비극적 시해 사건은 훗날 일본의 한 젊은 지성인을 한국으로 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일본인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 독도연구소장)가 주인공이다. 그가 일본을 오가며 찾아낸 독도에 관한 실증적 자료는 그동안 우리가 국가적으로 수집한 내용을 압도하고 있다. 호사카는 대학 시절 명성황후의 비극적 죽음을 알게 되면서 한국으로 건너와 역사 공부를 했고 15년 만에 한국인으로 국적을 바꿨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만주 뤼순 감옥에 갇혔던 안중근 장군은 자신의 행위 이유를 15가지로 정리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남의 나라 국모를 죽인 죄를 복수하기 위해 이토를 사살했다"라고 고백했다. 황후의 처참한 죽음이 조선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한 것이다.
아픈 역사가 봉인되어 있는 구시다 신사를 나와 후쿠오카의 번화가인 나카스 강변에 섰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라는 말처럼 격동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돌아보자면, 125년 전의 이 사건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 소레와 소레, 고레와 고레(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라는 식의 현실적 대처 때문일까. 물론 한일관계의 현실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충분히 동의한다. 역사와 교류 문제를 나눠서 투 트랙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과거로 미래를 다 덮어내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슬픈 '칼의 기억'만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때가 오면 반드시 그 역사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김경한 /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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