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 1 >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정말 무능하게 짝이 없었던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원군을 좀 파병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보냈어요. 그랬더니 일본군도 조선에 상륙하는 것이 아닙니가! 이는 동학혁명 이전인 1885년에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텐진 조약'의 '청일 양국 중 하나가 조선에 파병하면 나머지 국가도 똑같이 파병한다'라는 조항 때문이었습니다. 동학군 진압이 명분이 되어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냈으니 일본도 똑같이 군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청군과 일본군, 이 두 외세가 조선 땅에 들어온 것을 본 동학농민군은 ‘조선이 외세에 휘둘리는 것은 허용 못 한다'라는 생각으로 맞서 싸우던 조선 조정과 화해하고 자진 해산합니다. 그럼 일단 '반란'이 끝난것이니 진압하러 왔던 청·일 양국 군대가 물러가야 하잖아요? 청나라 군대는 다시 돌아가려 했어요. 그런데 일본군은 돌아갈 의지조차 없었습니다. 심지어 군대를 더 조선 땅에 주둔시키면서 급기야 조선 조정을 협박하기 시작했어요. ‘조선은 청나라와 맺은 모든 조악을 다 폐기하고 자주 독립국임을 스스로 증명하라'라는 어이없는 요구였죠. 그걸 왜 조선이 일본한테 증명해야 하나요?
하여간 일본군은 경복궁까지 에워싸고 무력시위를 합니다. 심지어 남산 위에 포대를 설치하고 포문을 경복궁 쪽으로 조준해요. 여차하면 일국의 왕도 대포로 날려버리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협박이었죠. 그러더니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납치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고종을 협박해서 약속 문서를 받아냅니다. '조선은 청나라와 맺은 모든 조약을 폐지한다. 그리고 청군은 빨리 조선을 떠나라.’
일본,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키다
일본은 청나라와 한판 전쟁을 시작합니다. 1894년 7월 25일, 그러니까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지 이틀 후, 충남 당진 풍도 앞바다(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서 일본군이 청나라 해군을 기습 공격합니다. 선전포고 따위는 없었습니다. 정말 기습 '선빵'을 날린 겁니다. 청일전쟁이 일본이나 청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청일 전쟁은 두 나라가 '조선 땅'에서 벌인 전쟁입니다. 어이가 없지요.
청나라는 지상전으로 일본을 꺾을 계획을 세웁니다. 그 결전의 장소는 '평양'으로 정했어요. 1894년 9월 15일, 평양에서 일본군 1만 7,000명과 청나라군 1만 4,000명의 교전이 시작됐습니다. 결과는 일본군의 완벽한 승리였어요. 일본군 전사자는 200명이었던 반면, 청나라 측 전사자는 2,000여 명, 그리고 부상 4,000여 명. 지상전에서도 청나라는 일본에 상대가 안 되었던 것이죠.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군을 다 물리치고 그 여세를 몰아 1895년 1월 19일, 중국 산둥반도에 있던 청나라 해군 사령부를 깨부수고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일본의 완벽한 승리였어요. 한때 대륙을 호령했던 청나라가 종이호랑이가 된 순간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청나라는 조선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터닝포인트였습니다. 수백 년 동안 중국의 영향 아래 있던 조선이 이제 일본의 손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으니까요.
< 2 >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드디어 러시아를 선 공격합니다.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던 뤼순항을 기습 공격한 것입니다. 청일전쟁 이후부터 이러한 선제공격에 도가 튼 모습으로 보입니다. 일본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어요.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은 약 10만 명. 반면에 당시 파병할 수 있는 일본군은 25만 명. 그리고 전쟁이 터진 후 러시아가 저 멀리 7,000킬로미터 떨어진 모스크바로부터 동아시아에 추가 파병을 하더라도 이동하는 데만 최소 40일이 걸립니다. 아예 선제공격으로 초전에 박살을 내겠다는 생각이었지요. 일단 뤼순항에서 공격하고 바로 다음으로 조선의 제물포(인천)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함선들도 격파시킵니다.
맞습니다. 청일전쟁처럼 러일전쟁도 러시아, 일본 땅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과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정말 어이가 없죠. 하여간 선빵 이후, 일본은 조선(이제는 대한제국)의 육로를 통해 육군을 신속하게 랴오둥반도 지역으로 이동시킵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1905년 1월, 러시아의 뤼순항이 일본군에 점령당합니다. 그리고 1905년 3월, 멀리 러시아 본토에서 기차 타고 달려온 러시아 육군 대군도 봉천(지금의 중국 심양)에서 일본군에서 패하고 맙니다. 동양의 작은 섬나라 일본에 연전연패를 당하던 러시아의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졌죠. 러시아는 최후의 카드를 꺼냅니다. 러시아 최강의 발트함대를 일본 앞바다로 출동시킵니다.
발트해는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 등에 끼어 있고 일본에서 엄청나게 먼 곳에 있는 바다입니다. 거기서부터 함대는 일본을 향해 출발했어요. 어떤 항로로 가는지 알아보자면, 일단 1904년 10월 발트해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남아공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지나 동남아시아를 거쳐 대만 앞바다를 지나 그다음 해인 1905년 5월에 겨우 대한해협에 도착합니다. 아무리 세계 최강 러시아 발트함대라고 해도 이정도 강행군이면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겠죠.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대한해협 대마도 앞바다에 도착한 이미 지친 러시아 해군들이었습니다. 편히 쉬면서 기다리던 일본 해군은 그들을 완벽하게 격파시켰고요. 이로써 러일전쟁은 일본의 완벽한 승리로 끝납니다. 지금도 일본 대마도에는 당시 러일전쟁 발트함대와 싸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답니다.
< 3 >
일본은 드디어 군부 강경파의 주도로 만주 침략을 결정합니다. 중국은 이미 청나라가 망한 후에 장제스(장개석)의 국민당과 마오쩌둥(모택동)의 공산당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소위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중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만주를 침공한다고 해도 중국 본토는 대응할 여력이 없으리라 판단한 겁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1931년 9월 18일, 중국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무력 도발을 시작한 일본군은 결국 만주 지역을 손쉽게 점령합니다. 이것을 중국은 '만주사변' 또는 9월 18일에 일어났다고 해서 '9·18사변'으로 부르면서 아직도 치욕적인 역사로 기억하고 있어요.
일본은 그렇게 중국 대륙 침략에 나서게 됩니다. 일본군은 총공세를 펼치면서 곧바로 베이징을 접수합니다. 그리고 중화민국의 수도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합니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중국의 수도가 베이징이 아니었습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란 공화국이 세워졌을 때, 중화민국 정부는 수도를 상하이 옆에 있는 난징(남경)으로 옮겨요. 베이징이 수도가 된 건 한참 후의 일입니다.
일본군의 목표는 당시 수도였던 난징이었습니다. 난징을 점령하기 위해서 바로 옆에 있는 상하이를 먼저 쳐야 했어요. 1937년 8월 13일, 남쪽으로 내려온 일본군과 중국군이 상하이에서 충돌하게 되고, 일본군은 이 싸움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만주를 그렇게 쉽게 접수했고, 청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도 빠르게 수중에 넣었으니까요. 하지만 상하이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중국군은 최정예부대였습니다.
일본군은 애초에 “2주 만에 상하이 점령이 가능하다" 라고 큰소리쳤지만 중국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3개월을 고생합니다. 당황한 일본군은 추가 병력을 요청했고 결국 일본군 10만 대군이 상하이에 들이닥칩니다. 솔직히 그때까지 중국과 일본이 전투를 벌인 만주와 베이징 등은 '지역교전'의 수준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상하이 전투는 드디어 몇십 만 대 몇 십 만의 전쟁이 벌어지는, 즉 중일전쟁 발발 이후 첫 국가급 A매치'가 시작된 겁니다.
3개월간의 치열한 공방 끝에 일본군은 어렵게 상하이를 접수합니다. 하지만 일본군도 9,000명이 넘는 전사자와 4만 명이 넘는 부상자가 생기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어요. 예상치 못한 격전을 벌이고, 그만큼 피해가 막심해진 일본군은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다음 타깃인 난징으로 향했어요. 그렇게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곳에서 '난징대학살'이 일어나게 됩니다.
난징을 접수한 일본군은 그토록 원하던 복수극을 벌입니다. 난징에 남아 있던 중국군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무참하게 도륙했습니다. 난징을 함락한 이후부터 무려 6주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합니다. 중국 측의 공식적인 주장에 따르면, 일본군은 약 30만 명의 난징 시민을 학살했습니다. 이것이 1937년 일어난 '난징대학살' 입니다. 일본군들은 극악무도하게도 누가 더 먼저 100명의 목을 베는지 참수 경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당시 일본 언론들은 이러한 천인공노할 만행을 무슨 스포츠 중계하듯이 신문에 대서특필하기도 했고요. 충격적인 내용이지만, 어린아이를 공중에 던진 후 창검으로 받고 또 하늘로 던진 후 또 다른 창검으로 받는 것을 ‘스포츠’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 4 >
1940년 9월, 일본은 본격적으로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합니다. 미국은 ‘일본 이놈들이 선을 넘네'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시 미국 국내여론은 남의 나라 전쟁에 끼지 말자란 쪽에 더 가까웠어요. 1차 대전의 악몽이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죠. 미국 정부는 고심 끝에 전쟁을 벌이지 않으면서도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1941년 8월 2일, 미국은 일본에게 석유 금수 조치를 내립니다. 일본은 상당량의 석유를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기에 미국은 일본에게 가는 석유를 끊어버린 거죠. 탱크를 움직이는 데도 석유가 필요하고, 전투기가 나는 데도 석유가 필요하니까 곧 석유가 떨어질 거라 여겼습니다. 석유가 부족해진 일본이 자연히 전쟁을 중단할 거라는 계산을 했고요. 일본은 크게 당황해서 대책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히로히토 일왕이 도쿄에서 긴급 어전회의까지 열어서 연일 논의를 거듭할 정도였어요.
결국 일본은 미국에 협상을 요청합니다. 이 협상 제의에 미국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어요. 첫째, 일본은 인도차이나에서 물러갈 것, 둘째,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중단할 것. 이러한 조건을 보고 일본은 황당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이미 중국과의 전쟁이 4년 차로 접어들고 있는데 여기서 중단하라니, 이건 분명한 내정간섭이라고 여깁니다.
< 5 >
그럼 왜 진주만인가? 일단 하와이 진주만엔 미 해군 태평양 함대 기지가 있었어요.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 지상군만 6만 명, 구축함은 54척, 잠수함은 22척, 전투기는 450대. 어마어마한 병력이었지요. 미국 입장에서는 어떤 미친놈이 감히 진주만을 공격하겠어?'라는 생각을 가질 만했어요. 미국 내에서는 이미 일본이 미국을 어떤 식으로든 공격할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 상태였는데 그 예상 타깃은 필리핀 정도였어요. 진주만은 일본에서 무려 5,600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데다 미국 최정예 병력이 집결해 있던 곳이니 예상하지 못했던 거죠. 하지만 일본은 '그 어떤 미친놈'이 되고 맙니다.
일본, 하와이 공습 불타는 진주만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시 19분,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사령관은 선전포고문이 워싱턴에 전달되었을 거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의 명령에 따라 일본 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일본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일제히 하와이 진주만 공습에 들어갑니다. 일요일 오전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진주만의 미 해군은 일본의 기습 공격을 받고 허둥지둥하게 됩니다.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었어요.
이 공격으로 인해 미군에서는 무려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고 전함 애리조나호, 오클라호마호 등 4척의 대형 전함은 폭격을 맞고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애리조나호의 경우, 탄약 격납고에 폭탄이 직격으로 떨어져 1,000명의 미군 수병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참극도 발생했지요. 이러한 일본의 공격 소식은 미국 본토와 수도인 워싱턴에 급보로 알려졌습니다.
미국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진주만 공격 다음 날인 12월 8일, 미 의회에서 연설을 합니다. 그 유명한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umny Speech)'입니다.
"1941년 12월 7일은 우리 미국 역사에서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겁니다. 미국 의회에 공식적으로 요청합니다. 일본과의 전쟁을 승인해주십시오. 루스벨트는 외쳤습니다. 의회는 바로 승인했고,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갑니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 5 >
1942년 5월 7일, 미국, 일본 양측의 항공모함들이 호주 바로 위의 산호해라는 바다에서 정면 출동합니다. 이 전투는 인류 역사상 첫 ‘항공모함전'으로 기록됩니다. 바로 산호해 해전 (Battle Of The Coral Sea) 이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초반엔 양측 모두 서로의 항공모함 위치를 찾느라 우왕좌왕했습니다. 전투기에 레이더가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적군 탐지는 오로지 맨눈으로 확인해야 했답니다. 그래서 정찰기의 역할이 정말 중요했지요. 먼저 적군을 찾아내서 공격을 날리는 쪽이 이길 확률이 높던 전쟁이었습니다. 얼마나 허술한 항공모함전이었냐면 작전을 마친 아군 전투기가 적군 항공모함 갑판에 착륙할 정도였답니다.
앞서 산호해 전투에서 미국과 일본은 서로를 확실하게 굴복시키지 못했었죠. 일본은 다시 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작전을 구상합니다. 바로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미국령 미드웨이 제도를 점령하는 작전이지요. 미드웨이는 하와이 서쪽에 있는 제도예요. 일본군이 이 미드웨이를 점령하면 바로 옆 하와이도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은 초반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도우사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납니다. 일본의 모든 항공모함은 물론, 싣고 왔던 전투기들마저 거의 다 잃게 되었고요. 그에 비해 미국은 단 1척의 항공모함만 격침되었답니다. 그러나 일본은 항공모함보다 더 큰 피해를 봤습니다. 바로 수백 명에 달하는 전투기 조종사들, 그리고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수리하는 고급 기능사들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린 것이죠. 모두 바다에 수장됐으니까요! 아시다시피 비행기 조종은 ‘3개월 속성' 이런 게 없습니다. 정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만들어지는 것이 고급 인적 전투기 조종사들인데 단 한 번의 전투로 다 잃어버린 겁니다. 이후 일본은 미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패하게 됩니다.
일본 본토를 공격하려면 B-29 등 대형 폭격기들이 출격해야 하는데 항공모함에서는 절대 이륙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거리 계산을 해보니 사이판을 점령하면 항속거리 5,000킬로미터에 달하는 B-29 폭격기가 사이판을 이륙해서 일본의 수도인 도쿄를 충분히 공습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 겁니다. 그리고 1944년 6월 11일, 미 전투기 1,100대가 일제히 사이판을 공습하면서 사이판 점령 작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6월 12일까지 이틀 동안 무려 17만 발의 함포 사격으로 사이판의 일본군 기지들을 말 그대로 가루로 만듭니다.
< 6 >
도쿄 상공에 도착한 B-29 폭격기들은 도쿄 시내의 약 9,000개 타깃을 불바다로 만듭니다. 도쿄 시민들은 완전히 불구덩이에 갇히고 맙니다. 당시 미군 B-29 폭격기들은 공습의 정확도를 위해서 저공비행을 했습니다. 폭격기 조종사들은 불에 타는 도시와 시민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겠지요. 일부 조종사는 한 손으로는 조종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집니다. ‘주여, 제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그들도 눈앞에 펼쳐지는 생지옥을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미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3월 11일 나고야 공습, 3월 13일 오사카 공습, 3월 16일 고베 공습, 3월 18일 나고야 2차 공습까지. 그야말로 일본을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오키나와전투 그리고 가미카제 특공대
이오지마를 점령하고 도쿄 대공습을 마친 미군은 좀 더 본토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바로 오키나와 점령이었습니다. 오키나와는 일본 규슈 아래에 있지요. 만일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면 일본 규슈 점령은 누워서 떡 먹기고 규슈가 미군에 넘어가면 일본 본토 점령은 기정사실이 되는 거였습니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은 55만 명의 대규모 병력으로 오키나와 점령 작전에 들어갑니다.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약 12만 명의 일본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미군과 맞서 싸웁니다. 특히 일본군은 모두 '옥쇄(玉碎)'를 각오합니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지다'라는 뜻으로 일왕을 위해 싸우다가 아름답게 죽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헸습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역사 속에서 많이 언급되었던 일본의 공군 자살 특공대를 일컫습니다. 이미 수많은 전투에서 정예 전투기 조종사들을 잃은 일본은 마지막 발악을 합니다. 어리고 조종 경험도 없는 풋내기 조종사들에게 목적지 근처까지만 갈 수 있는 연료를 넣은 전투기를 몰고 가서 다른 전투기에 돌진하게 시킨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전투기 조종은 숙련된 조종사만이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만 하더라도 3~4개월 운전해서는 아직 초보운전인데, 전투기 조종을 속성으로 가르친다고 과연 제대로 조종이 가능했을까요? 약 1,000대의 가미카제 특공대 전투기가 오키나와 전투에 희생됐는데 안타깝게도 목표물까지 제대로 날아간 전두기는 거의 없었습니다. 실수든 조종 미숙이든 가는 도중 바닷속으로 떨어졌습니다.
< 7 >
일본의 고집으로 반토막 난 한반도
1945년 4월이 되자 소련은 태평양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을 할 기미를 보입니다. 이미 유럽에서 2차 대전이 마무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때였지요.. 그런데 미국은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여를 막으려고 했어요. 미국이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거의 다 끝낸 전쟁인데, 이제 와서 소련이 숟가락을 얹게 할 수는 없었어요. 만일 도쿄 대공습으로 수도가 불바다가 된 1945년 4월 즈음, 일본이 미국에 항복했다면 한반도는 남북으로 쪼개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일본은 원자폭탄의 처참함을 경험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끝까지 버티면서 소련의 참전을 기다렸어요. ‘천황제 유지'가 그 이유였어요. 일본이 설사 지더라도, 미국에 항복할 바에는 소련에 항복하는 것이 천황제 유지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판국에 일왕과 일본 정부는 고작 천황제 유지에 집착하고 있던 겁니다. 그리고 일본은 자국민들에게 ’본토 사수'를 외칩니다. 모든 국민이 들고일어나 일왕을 지키자는 뜻이었죠.
미국은 2차 대전이 종료된 1945년 7월 26일, 독일 포츠담에서 포츠담 선언 (Potsdam Declaration)을 합니다. 잠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까 일본 너네는 무조건 항복해!' 라는 내용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이 포츠담선언이 7월 26일에 이루어졌는데, 일본이 만약 바로 항복했다면 8월 8일 소련군의 태평양 전쟁 참전 또한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가정은 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끝까지 미국의 항복 제안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그러고는 소련에게 매달리기 시작해요. 소련에게 빨리 참전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신처럼 모시는 일왕을 계속 그 자리에 앉힐 수 있으니까요.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 지배권 그리고 쿠릴 열도 진출 등을 목표로 태평양 전쟁 참전 여부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이었답니다. 소련은 이미 시작된 미국과의 경쟁에서 태평양 지역의 패권 확보를 위해서 그리고 만주와 극동 지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태평양 전쟁 막판에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듭니다. 결국 소련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를 후인 1945년 8월 8일, 일본의 소원대로(!)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죠. 그리고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 38도 선으로 인해 남북한이 분단됩니다. 우리가 일본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 8 >
일본이 끝까지 버티자 미국은 이른바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을 구상합니다. 일본 주요 도시에 원자폭탄을 하나씩 다 떨어뜨려 풍비박산을 만들고, B-29 폭격기 6,000대를 출격시켜 일본의 논밭을 다 초토화한 후, 거기에 제초제까지 뿌려 앞으로 농사를 못 짓게 만들겠다는 구상이었죠. 공격 강도를 보면 일본을 세계지도에서 지워버리려한 시도처럼 보였습니다. 구상 단계에서 그쳐서 망정이지, 그 수준까지는 가지 않아서 일본으로서는 다행인 일일지도 모릅니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 투하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군이 일본 본토 상륙 시 예상되는 사상자 수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지옥같이 달려들던 일본군을 경험한 미군 역시 엄청난 트라우마에 시달렸으니까요. 미군은 자국 군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1945월 8월 6일, 히로시마 현지 시각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됩니다. 그리고 8월 9일,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됩니다. 일본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목표는 일왕이 살고 있던 도쿄 혹은 적어도 일본의 상징적 수도 교토가 쑥대밭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는 이른바 '옥음(玉音, 일왕의 음성이라는 뜻) 방송'라디오 연설을 통해 패전 사실을 일본 국민들에게 알립니다. 일왕을 신으로 생각하던 일본 국민들은 왕의 육성을 처음으로 직접 듣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신으로 생각했던 왕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패전을 언급하자 일본 국민들은 주저앉아 통곡했습니다. 이 패전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일부 일본군 장교들은 일왕 히로히토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일본은 지면 안 된다고 외치며 쿠데타까지 시도했습니다. 물론 진압이 되었지만, 그만큼 일본의 상황은 수습 불가 상태와 비슷했습니다.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 해군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은 항복 문서에 서명합니다. 일본 측에선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사인했는데 그는 다리를 절면서 들어왔습니다. 1932년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다리 부상을 입었었거든요. 항복 문서에 서명 후 일본은 드디어 태평양 전쟁의 패전국으로 남습니다. 1853년 도쿄만에서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당했던 일본은 약100년이 지난 1945년, 같은 자리에서 미국에 항복하게 된 것입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의 상황은 그야말로 '석기시대'로 돌아간 상태였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나 시설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먹을 음식조차 없어 굶어 죽는 사람도 속출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본을 구해줄 구세주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1950년 한국전쟁이었죠. 당시 요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총리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단 소리를 듣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우리 일본은 이제 살았다.”
썬킴 /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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