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 1 >
1차 대전이 터질 수밖에 없었던 그 배경부터 보도록 하지요. 자,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한 1914년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독일로 날아가 봅시다.
1815년 독일 영토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하나의 통일된 나라가 아니네요? 당시 독일은 크고 작은 38개의 국가가 느슨한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던 상황이었어요.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나중에 독일 통일을 이끄는 프로이센도 있고, 오스트리아도 있네요. 오스트리아도 독일어를 쓰냐고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룩셈부르크, 바이에른, 작센 등등 근방에 독일어를 쓰던 동네들은 다 들어갑니다. 그 연합체를 '독일 연방(Deutsche Bund)'이라고 불렀어요. 말이 연방이지 주변에 독일어 쓰는 나라 다 모여서 우리끼리 뭐라도 좀 해보자는 취지로 모인 독일어 친목 모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오합지졸 연합이라고 해도 멤버들 중 힘 좀 쓰는 동네가 당연히 있었겠지요. 그 동네의 '원톱'은 오스트리아였습니다. 당시 객관적인 국력은 오스트리아가 연방 회원국 가운데 가장 선두였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넘버투' 프로이센이 따라오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독일 연방의 실질적 리더였던 오스트리아의 갑질이 너무 심했다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이의 갑질 때문에 다른 연방 회원국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오스트리아의 상대가 안돼 대들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참고 참던 프로이센이 폭발해서, 오스트리아에 태클을 건 사건이 일어납니다.
< 2 >
프랑스는 국내 여론에 등 떠밀려 얼떨결에 전쟁을 시작한 반면 프로이센은 이미 비스마르크의 철저한 준비로 전쟁 태세가 완료된 상태였습다. 프로이센군은 4년 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때 실전 경험을 쌓은 백노장들이었지요.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노련한 외교술까지 펼쳤습니다. 초강대국 프랑스가 약소국 프로이센을 공격하네요! 이런 부도덕한 전쟁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국제 사회에 읍소한 것입니다. 맞는 말이었요. 그래서 영국, 러시아 등도 선불리 전쟁에 간섭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쟁은 2개월도 채 안 되어서 프랑스의 완패로 끝났어요. 특히 프랑스 국왕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9월 1일 프로이센군에 포로로 잡히는 수모까지 겪었습니다. 이어 9월 19일에 프랑스 파리까지 프로이센군에게 함락당했어요. 당시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완전 봉쇄해서 보급을 모두 끊어버리는 고사(姑死) 작전을 펼쳤습니다. 먹을 게 없었던 파리 시민들은 동물원의 동물은 물론 심지어 쥐까지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파리를 사수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프로이센에 백기를 들고 맙니다.
당시 유럽 초강대국 프랑스의 수도까지 점령한 프로이센이 마침내 독일 연방의 넘버원에서 유럽의 넘버원으로 등극한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프랑스는 역사상 최악의 굴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파리를 점령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전쟁 다음 해인 1871년, 프랑스 베르사유 왕궁, 그것도 가장 화려한 거울의 방에서 독일 통일을 선언한 것입니다.
< 3 >
보스니아는 1878년부터 오스트리아의 식민지 상태였어요. 그리고 바로 옆 세르비아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비아는 나라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국민 대부분이 세르비아계 민족이었어요. 그리고 보스니아는 당시 국민의 약 50% 이상이 세르비아계였습니다. 그러면 세르비아는 보스니아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뭘 요구했겠습니까? ‘왜 남의 나라에 살고 있어? 심지어 이제는 오스트리아 식민지잖아. 당신들도 세르비아계니까 그냥 독립해서 우리와 합쳐서 잘 살아봅시다!'라고 했겠지요. 이런 복잡한 상황 가운데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그러니까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이었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자기 나라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였던 보스니아를 둘러보고 오기로 했어요. 자기네 나라 식민지였는데 이 땅의 주인은 나다! 우리 오스트리아다!' 하며 보스니아 국민에게 보여주려고 했겠지요.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한 후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지도부 주최 환영 만찬을 가졌어요. 만찬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고 마차에 황태자 부부가 올라탄 순간, 갑자기 “세르비아 독립 만세!”라는 외침과 함께 총격 소리가 들립니다. 그렇게 황태자 부부는 백주에 암살당합니다. 총을 쏜 범인은 보스니아국적의 세르비아계 대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Princip)라는 청년이었어요.
그 청년의 바람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국민들이 세르비아와 합치는 것이었어요.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식민지로 삼지만 않았어도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옆 나라이자 고향인 세르비아로 넘어가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원수 오스트리아가 망쳤다고 여겼고, 황태자가 보스니아로 온다고 하니 가만 놔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황태자 부부가 저격을 당한 그순간까지도 유럽 각국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 총격 사건 하나가 유럽을 대학살의 현장으로 몰아넣는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될 줄은요.
< 4 >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도 7월에서 시간이 흘러 어느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어요. 바로 이때 ‘1차 대전 전장의 기적'이라 불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어김없이 총격전이 끝난 24일의 밤, 독일참호 안에서 조용히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어요. 병사들이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노래를 들은 반대 진영의 프랑스·영국군도 맞받아 캐럴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서로의 참호 속에서 참혹한 전쟁 중에도 그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온 것입니다. 누가 약속한 것도 아닌데 그들은 마치 휴전한 듯이 각자의 진영에서 무인지대로 걸어 나와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고, 사진도 찍고 음식도 나눠 먹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만큼은 서로 싸우지 말자고 하면서요. 그야말로 크리스마스가 가져다준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12월 25일 성탄절 당일에는 아예 양측 군이 무인지대에서 축구 경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결과도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독일 축구는 그때도 강했나 봅니다.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독일이 3대2로 이겼다고 해요. 그런데 이 소식이 양측 군 수뇌부에 들어갔어요. 격분한 양측 수뇌부는 ‘이거 안 되겠다. 이럴 때가 아니다. 지금부터는 속전속결이다'라는 생각에 대량 살상 무기를 전쟁에 투입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독가스였어요.
< 5 >
1915년 5월 7일 뉴욕에서 출발해 영국 리버풀로 향하던 영국의 초호화 여객선 '루시타니아호(RMS Lusitania)'가 유보트에 격침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무려 1,957명이 수장되는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문제는 그 배에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인도 128명 타고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는 구실을 제공하고 말아요. 왜냐? 당시 미국인들은 불과 3년 전인 1912년 4월 10일에 있었던 '타이타닉호' 침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던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일부에서는 타이타닉호 침몰이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을 이끌었다는 주장도 있어요.
하여간 루시타니아호 침몰에 미국은 격분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우드로우 윌슨(T.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독일에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미국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라고요.
< 6 >
1917년 4월 당시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의 급진 좌파 지식인 한 명을 몰래 기차에 태워 러시아로 보내버린 것인데 이 인물이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었어요. 그는 러시아 황제를 쫓아낸 후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고 나중에 소련이라는 나라를 세웠죠.
독일이 러시아로 보낸 레닌이 이끄는 노동자 세력은 결국 1917년 10월 25일 러시아 황제를 내쫓고 새로운 노동자들의 정권을 세웠어요. 이걸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해요. 볼세비키(Bol'sheviki)는 원래 '다수파'란 뜻인데 혁명 당시 레닌이 이끌었던 다수파인 노동자 세력을 '볼셰비키'라고 부르면서 레닌 지지자들의 별칭이 되었답니다. 하여간 독일 입장에선 동부전선에서 전쟁하던 러시아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러시아에서 새로 집권한 레닌이 갑자기 “자본주의 세력이 이끌던 전쟁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 라고 종전 선언을 했기 때문이죠. 이렇게 갑자기 동부전선이 없어집니다,
< 7 >
파리 강화회의란 간단히 말해서 '독일, 이제 피해 보상해라. 돈부터 갚아'라고 요구하는 자리였어요. 연합국이 독일에게 요구했던 내용은 정말 혹독했습니다. 일단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때 독일령이던 중국 산둥성의 칭다오가 일본에 넘어갔어요.. 왜? 일본도 1차 대전 승전국이었답니다. 일본도 1차 대전에 참여했다니, 기억하시나요? 1차 대전 전에 영국과 일본은 동맹 관계였다고요. 일본도 연합군 측에 참전했고 몇 척 안 되는 군함이지만 지중해에 파견해서 영국 해군을 도왔답니다.
그리고 독일은 앞으로 10만 이상의 군대를 보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20년 안에 1,320억 마르크(당시 독일 화폐 단위) 상당의 배상금을 갚아야 했어요. 간단히 계산하면 독일의 1년 GDP(국내 총생산)의 10%를 매년 갚아 나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즉 독일 전국에서 1년 동안 생산한 것 중 10분의 1 수준을 매년 배상금으로 내라는 소리인데, 솔직히 독일이 망하기를 바라는 요구였죠. 결국 1차 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는 곤두박질칩니다. 당시 독일 화폐였던 마르크화는 말 그대로 휴지가 되었습니다.
썬킴(필명) /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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