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제2차 세계대전

송담(松潭) 2021. 8. 28. 15:02

2차 세계대전

 

 

< 1 >

 

 

1929년이 되자 미국에서는 세계 대공황 (Great Depression)이 터졌습니다. 대공황은 한마디로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주식들이 일순간에 전문 용어로 '휴지'가 되어버린 일입니다. 미국 경제가 한순간에 무너진 사건이죠. 발생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지금은 2차 대전을 다루고 있으니 유럽 상황에 맞춰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일단 총도 사야 하고 대포도 사야 하고 병사들 먹을거리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급전이 필요하니까 당시 신흥 대국이었던 미국을 통해 끌어다 썼어요. 그리고 미국에서 각종 물자도 일단 외상으로 빌려다 썼지요. 미국도 일단 외상이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물건을 왕창 사 가니까 장사가 잘되는가 보다 하고 신이 났습니다. 주가도 쑥쑥 오르다 보니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었지요. 그리고 전쟁이 끝났어요. 외상을 갚아야 할 시간이었지요. 그런데 막상 영국과 프랑스도 전쟁을 치르며 예산을 초과해 너무 많은 돈을 써버린 겁니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인 독일에 빚 청구서를 보낸 것이고요.

 

그런데 독일은 당연히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어요. 나라가 거덜났으니 원래 독일 → 영국·프랑스 → 미국 순으로 카드 돌려막기가 돼야 하는데 독일 자체가 거덜나는 바람에 돈맥경화가 걸린 겁니다. 영국과 프랑스에 외상으로 물건을 판 미국 기업이 연쇄 부도가 나면서 미국 경제가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사건이 바로 1929년에 벌어진 세계 대공황 입니다. 당시 미국은 노동 인구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어버릴 정도로 나라 경제가 주저앉아 버렸답니다.

 

대공황 시절의 미국은 전 세계 경제의 47%를 담당하던 국가였습니다. 거의 절반이었죠. 이런 나라가 쓰러지니 영국과 프랑스가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도미노처럼 차례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전 세계 대부분 국가가 피해를 봅니다. 그래서 그때 대공황을 '미국 대공황'이라고 안 부르고, ‘세계 대공황' 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독일은? 거의 재기 불가능 상태까지 갔고 정치판 또한 구제 불능이었고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십 개 군소정당은 나라가 개판이 되든 말든 국민들이 굶어 죽든 말든 신경 안 쓰고 권력 다툼으로 정신없었지요.

 

히틀러는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뭘 해야 될지도 정확하게 알았어요. 히틀러는 또 자신의 주력 무기인 연설을 통해 '독일이 지금 망하고 있는 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중도주의 의회 정치인들 때문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강력한 리더십입니다!' 하며 당당히 소리치고 다녔어요. 여기에 독일 여론도 호응해줬지요. 그래, 이런 아수라장을 정리할 사람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히틀러뿐이야'라고 말이죠. 실제로 대공황 이전인 1928년 독일 총선에서 겨우 2.6%의 지지율을 얻었던 나치당은, 한창 대공황이 진행 중이던 1930년 총선에서는 무려 18.3%의 지지를 받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히틀러는 아예 독일 대통령 선거까지 출마했고요. 1932년 4월 치러진 대선에서 히틀러는 36.8%의 지지율로 2위를 한 것입니다! 53%의 지지율로 1위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은 1차 대전의 전쟁 영웅이었던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장군이었는데요. 1차 대전 영웅과 맞선 대통령 대결에서 거의 막상막하의 경쟁을 벌인 겁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소위 '듣보잡' 신인 정치인이 었던 히틀러가 말이지요.

 

그렇게 1932년 대선 이후 히틀러와 나치당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갔던 세계 대공황이 히틀러라는 새로운 정치 스타를 만들어낸 것이었어요. 역사라는 건 참 아이러니하지요.

 

 

 

< 2 >

 

독일과 소련 두 나라는 193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됩니다. 독일과 소련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에게 공격을 안 하겠다는 조약이었죠. 스탈린도 나중에 전체 유럽을 히틀러와 반씩 나누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진 않았지만요.

 

히틀러는 정말 무서울 게 없었어요. 가장 무서운 잠재적 적인 소련이 독일 편이 되었는데 뭐가 무섭겠습니까? 적어도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할 동안 등에 칼 맞을 일은 없는 거죠. 그러면 영국, 프랑스는 도대체 독일과 소련이 손을 잡는 동안 뭘 하고 있었느냐 하면 그들도 독일이 소련과 손을 잡기 전에 먼저 소련과 협상하려고 했습니다. 1차 대전 당시 세 나라(영,프, 러)는 동맹 관계였잖아요.

 

그런데 큰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협상 상대가 러시아가 아닌 '소련'이라는 점이었죠. 영국과 프랑스의 국내 여론이 아니! 협상할 나라가 없어 공산국이랑 협상을 해? 말도 안 돼!'라는 분위기였답니다. 아시죠? 러시아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 공산국가가 된 상태였다는 것을요. 그렇게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국내 여론 눈치를 살피다가 소련과 손을 잡을 골든타임을 놓치고 맙니다. 하여간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이제 마음 놓고 독일과 소련 중간에 끼어 있던 먹잇감인 폴란드를 침공할 수 있게 된 겁니다.

 

 

< 3 >

 

 

1939년 8월 29일, 독일은 폴란드에게 '원래 독일 영토인 너희 땅, 좋은 말할 때 독일에게 돌려줘. 이거 마지막 경고야!'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당연히 폴란드는 단호하게 거부했지요. 독일은 더 본격적으로 폴란드 ‘무력' 침공을 준비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예요. 독일은 지금까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드 등은 평화롭게 피 한방울 안 흘리고 접수했잖아요. 만일 폴란드를 무력 침공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939년 9월 1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라는 선제공격 암호에 따라 나치 독일의 기계화 부대, 즉 탱크들이 일제히 폴란드 국경을 넘었습니다. 바로 2차 대전의 공식적인 시작이었습니다. 꼭 기억하세요. 1939년 9월 1일, 세계는 또 다른 세계대전의 시작을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라는 한 사람의 야욕 때문에요.

 

폴란드는 어이없게도 독일의 침공에 2주 만에 무너집니다. 첫 번째 이유는 독일군의 막강한 화력 때문이었어요.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에 기계화 탱크 2,300대, 전투기 2,500대를 총동원했습니다. 히틀러가 독일 군수산업 육성에 올인한 결과였어요.

 

 

< 4 >

 

 

마지노선은 프랑스의 국방부 장관이던 앙드레 마지노(Andie Maginot)가 만든 프랑스 서부전선 방어선 이름입니다. 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생지옥을 경험했던 프랑스는 혹시 나중에 또 독일과 전쟁을 치르는 일이 생기더라도 '서부전선 참호전'의 악몽만큼은 피하고 싶어서 1927년부터 마지노선을 건설하기 시작했어요.

 

이 방어선은 프랑스와 독일 국경을 따라 즉, 옛 서부전선을 따라 약 800킬로미터를 북에서 남으로 땅을 파서 지하에 건설한 지하 요새였습니다. 요새 안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하 도시로 꾸렸고 웬만한 폭격에는 끄떡없게 만든 데다 대공포와 장거리포 등을 촘촘히 설치해서 당시로선 독일 공격으로부터 프랑스를 지켜줄 최고의 철통 방어선이었습니다.

 

솔직히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고도 바로 프랑스로 진격하지 않고 몇 달 머뭇거린 이유도 이 마지노선 때문이었어요. 도저히 마지노선을 뚫을 엄두가 안 났던 것입니다. 마지노선으로 돌격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특공대가 되는 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노선에 엄청난 반전이 있었습니다. 마지노선의 중간에 약 7킬로미터의 구멍이 뚫려 있던 것입니다. 거대한 마지노선 요새가 이어지다가 건설이 안 된 부분이 있던 거죠. 왜그런 실수를 했을까요? 예산도 부족했거니와 ‘개구멍' 처럼 뚫려 있는 지점이 ’아르덴(Ardennes)'이라는 숲이 있는 지역으로 삼림이 굉장히 빽빽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렇게 삼림이 빽빽한데 독일군이 통과하기 힘들 거야'라고요. 물론 독일군이 1차 대전처럼 보병으로 아르덴 숲을 뚫고 들어오려 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좀 달랐어요. 보병이 아니었습니다. 1940년 5월10일, 나치 독일군은 기계화 부대, 즉 전차를 몰고 ‘개구멍' 아르덴 숲을 통과합니다. 서부전선이 와르르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프랑스가 그렇게 공들여 만든 지하 요새 마지노선이 허무하게도 '헛돈 쓴 지하실'이 된 겁니다.

 

 

< 5 >

 

영화 <덩케르트>는 실화다

 

꼼짝없이 독 안에 갇힌 쥐가 되어버린 프랑스 주력군, 그런데 그곳엔 프랑스군만 있던 게 아니라 이미 바다를 건너온 영국군도 있었습니다. 프랑스군 14만에 영국군 19만을 합치면 총 33만 명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프랑스 본토에서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지만 신통치 않았습니다. 군 물자 보급을 위해서는 독일군에 맞서 야 하는데 세계 최강의 탱크 기계화 부대를 뚫을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영국도 마찬가지였어요. 꼼짝없이 갇힌 영국군을 빼내기 위해 구조 병력을 보낸다면 그들 역시 포로가 될 상황이었죠.

 

연합군 수뇌부는 갇혀 있던 병사들에게 프랑스와 벨기에 접경에 있는 해안 도시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해안 도시가 바로 '덩케르크(Dunkirk)'였고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덩케르크>가 2차 대전의 프랑스 영국 연합군 구출 작전을 그린 영화입니다.

 

1940년 5월 26일, 덩케르크에 집합한 연합군 병사들, 특히 영국군의 탈출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병사를 한꺼번에 해안에서 탈출시키기에는 배가 턱없이 부족했어요.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민간 선박, 어선, 통통배, 심지어 귀족들의 호화 요트, 유람선 등 거의 700척에 가까운 선박들이 덩케르크 해안의 군인들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영국 본토에서 갖은 위험을 뚫고 출발한 배들이었어요. 민간 선박들은 배가 꽉 찰 때까지 병사들을 태웠고, 또 어떤 어선들은 정원의 30배가 넘는 병사들을 신고 출발해서 무사히 영국 땅에 돌아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총 9일간의 민군합동 탈출 작전으로 무려 총 33만 8,226명의 병사는 덩케르크에서 무사히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병력이 탈출할 때 독일군은 도대체 뭘하고 있었던 걸까요?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요? 마음만 먹었으면 탱크로 해안가에 갇힌 33만 명의 적군을 한순간에 전멸시킬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추후 이때 독일군이 공격을 하지 않은 일은 히틀러의 가장 큰 실수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 6 >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한 히틀러는 생각을 바꿉니다. ‘그래, 모스크바는 다음에 다시 공격하면 되고, 대신 소련의 유전지대를 차지해야지'라는 것이었죠. 어찌 보면 상당히 현실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전쟁도 탱크에 넣을 기름이 있어야 계속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한 도시를 목표로 정합니다. 바로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였습니다. 현재는 볼고그라드(Volgograd)라고 불리는 도시지요.

 

스탈린그라드는 유럽 중심부가 아닌 거의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남쪽에 있습니다. 내륙 안에 있는 가장 큰 바다인 카스피해 바로 위에 있지요. 히틀러로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겁니다. 수도 모스크바를 공략하는 대신 군대를 확 남쪽으로 돌려서 소련의 유전지대를 장악하기로 한 것이지요. 소련으로서도 스탈린그라드는 상징성 있는 도시였어요. 이름에 '스탈린'이 들어가게 된 이유가 있었죠. 이 도시에 애착을 느꼈던 스탈린은 소련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1925년에 자기 이름을 딴 도시 이름을 지은 거죠. 그 말인즉슨, 소련에게 이 도시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기에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인류 역사상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낸 비극적인 살육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서막이 오릅니다. 1942년 7월 17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치러진 이 전투의 공식적인 독일군 수는 40만 명, 소련군은 100만 명 이상이었어요. 이 한 번의 전투로 대부분 군인이 전사했고요. 민간인 희생자까지 합쳐 총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해요. 전투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독일군은 7초에 한 명씩 죽고, 소련군은 6살짜리 아이에게도 총을 쥐여주고 전쟁터에 밀어 넣었다고 합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The Enemy At The Gates, 2001)>가 바로 이 전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독일군과 소련군의 공방을 그린 영화인데, 이 전투의 참혹함을 가늠할 수 있는 수작입니다.

 

1942년 11월 19일이 되어 소련군은 새로 개발한 T-34 전차를 앞세우고 대대적인 반격에 들어갔습니다. 지원군이 도착한 겁니다. 이 T-34 탱크를 처음 본 독일군 장교들은 경악했어요. 지금도 이 T-34 전차는 ‘소련을 구한 애국 전차'라는 칭송을 받고 있답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에겐 트라우마를 안겨준 전차예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바로 이 T-34 전차를 몰고 38선을 넘어와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니까요. 하여간 이 T-34 전차 덕분에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됩니다.

 

스탈린그라드 도심 안에서 전투를 벌이던 만 명의 독일군은 도시를 에워싼 소련군에 의해 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가 되었습니다. 당시 스탈린그라드 총공세를 책임지던 독일군 사령관은 파울루스(Friechnichinks) 장군이라는 인물이었는데 해가 바뀌어 1943년이 되자, 도저히 스탈린그라드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히틀러 총통에게 후퇴를 허락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스탈린과의 자존심 싸움에서 절대 물러날 수 없었어요. '대게르만족이 슬라브족에게 질 수는 없다'라고 외치면서요. 그리고 파울루스 장군을 갑자기 육군 원수로 승진시킵니다. 육군 원수 타이틀을 줄 테니 명예롭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라는 뜻이었죠. 40만 명의 독일군 병사들과 함께요. 히틀러는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었습니다. 개죽음당할 수 없었던 파울루스 장군은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1943년 2월 2일, 소련군에 항복합니다. 치열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한 순간이었습니다. 40만 명이었던 독일 군대는 항복 당시 겨우 9만 명만 남아 있었고, 그나마 죽지 않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 병사는 겨우 5,00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단일 규모로는 최악의 사상자를 낸 스탈린 그라드 전투는 결국 소련이 승리를 거뒀습니다.

 

 

 

< 7 >

 

연합군의 반격, 노르망디 상륙작전!

 

동부전선에서 소련에 처절하게 패한 독일, 그다음에는 서부전선에서 하이킥 한 방을 또 맞습니다. 1944년 6월 6일, 우리가 이른바 디데이(D-day)라고 부르는 연합군의 대반격,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된 겁니다. 당시 나치 통치를 받던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을 해방하기 위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 펼쳐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이 6월 6일의 상륙작전을 소재한 영화 제목도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1962)입니다. 총 156만 명의 연합군, 군용차량 33만 대가 프랑스로 쏟아져 들어간 작전이었기 때문이죠.

 

이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많아요. 가장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톰 행크스 주연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입니다. 독일은 스탈린 그라드에서 패한 후, 동부전선에서 소련에 의해 완전히 박살 난 상황이었죠. 이 부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2차 대전 중에는 소련도 미국, 영국과 함께 연합군이었다는 사실을요. 이상하지요? 소련과 미국이 한 팀이 되어 손잡고 싸웠던 적이 있으니까요. 이제 연합군 입장에서는 서부전선만 꺾으면 게임 끝인 상황이 온 거죠.

 

그런데 작전을 시작하기 진, 가장 큰 문제는 무려 150만 명 이상이 상륙하는 대규모 작전을 독일 몰래 진행해야 하는 점이었습니다. 일단 연합군은 기만 작전을 펼칩니다. 독일군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요. 노르망디가 아닌 좀 디 북쪽에 위치한 도버해협으로 상륙한다는 정보였죠. 도버해협은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가깝게 붙어 있는 해협이거든요. 이론상 긴급 상륙작전에 가장 유리한 곳이었죠. 연합군은 그다음으로 대서양 해안 지역의 독일군 레이더 기지들을 다 부숴버렸습니다. 노르망디으로 다가오는 연합군 함대를 포착하지 못하게 한 것이죠. 심지어 1944년 6월은 프랑스 해안 지역에 엄청난 악천후가 몰아쳤던 때였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오판합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가 아닌 곳에 상륙하고, 또 상륙을 한다고 치더라도 최악의 기상 상황을 뚫고 작전을 강행하지 않을 거라고 여긴 거예요. 심지어 당시 대서양 방어를 총책임지고 있던 '사막의 여우' 독일군 로멜(Rommel) 장군도 고향 베를린으로 휴가 갔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4년 6월 6일, 그날이 왔습니다. 연합군은 독일군을 완전히 속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150만 명의 연합군 대군이 프랑스 땅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히틀러는 연합군의 상륙이 개시된 이후에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여전히 기만 작전이라고 여겼던 거죠.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척하면서 도버해협으로 넘어올 거라고 끝까지 착각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일군은 대응할 타이밍을 놓칩니다. 독일군은 연전연패하기 시작했고 연합군은 막힘없이 프랑스 내륙 지역으로 밀고 들어왔어요.

 

실패한 히틀러 암살계획

 

이때쯤 독일군 수뇌부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의 군 작전 능력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몇몇 독일군 엘리트 장교들이 ‘저 미친 히틀러만 없으면 전쟁이 끝난다'라는 믿음으로 히틀러 암살 작전에 들어갑니다. 1944년 7월 20일, 독일군의 클라우스 폰 슈 타우펜베르크 타우펜베르크(Clais von Stauffenberg) 대령과 그의 동료들이 히틀러가 회의 하던 회의장 채상 밑에 시한폭탄을 설치합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나 봅니다. 폭탄이 설치된 위치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앉았던 히틀러는 폭발에도 고막만 찢어지고 살아남았어요.

 

 

< 8 >

 

 

이런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베를린 사수에 나선다. 그러나 베를린을 지킬 병사는 이미 전투에서 거의 다 전사한 후였어요. 그래서 히틀러는 독일인 남자 16세에서 60세까지 총을 들 수 있는 자는 다 모아서 베를린을 사수하기로 해요. 유겐트(Hitler- Jugend)라고 불리던 10~18세의 청소년 대원들에게도 총을 쥐여줬습니다.

 

1945년 4월 28일, 베를린을 향해 돌진해온 소련군이 사실상 베를린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이제 승산이 없다'라는 보고가 히틀러에게 들어갑니다. 그다음 날인 4월 29일, 히틀러는 나치 독일 패망 직전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바로 자신의 애인이자 평생 사랑했던 유일한 여인 에바 브라운(Eva Braun)과 올린 결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4월 30일 오후 3시 30분, 아돌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부부는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동반 자살을 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지만 1차 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히틀러, 1933년에는 일개 무명 정치인으로 정권을 잡은 후 독일을 재무장시키고 유럽을 2차 대전이라는 대살육전으로 몰아넣었던 그는 그렇게 생을 마감합니다. 56세였습니다. 그리고 1945년 5월 8일, 독일군은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합니다. 그렇게 유럽에서의 2차 대전은 막을 내립니다.

 

 

썬킴(필명) /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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