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막부(江戶幕府)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일본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일본의 왕인 덴노(天皇)와 쇼군(將軍) 두 시스템을 이해해야 합니다. 덴노에 대해 먼저 알아보기로 하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에서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이 있답니다. 바로 '일본은 한 번도 왕조가 바뀐 적이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중국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으로 왕조가 바뀌어 왔고 우리나라도 신라, 고려, 조선 등으로 왕조가 바뀌어 왔잖아요. 일본은 기원전 800년경 제1대 덴노인 진무 덴노(神武天皇)가 일본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왕조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일왕(덴노)인 나루히토 일왕은 무려 126대 일왕입니다. 이걸 일본인들은 소위 '만세일계(世系)'라고 불러요. 한 번도 일왕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만 년 동안 이어져 왔다는 주장이지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하나의 왕실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 역사에서 덴노는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하던 실권자가 아니라 상징적인 존재로 모셔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럼 일본을 실제로 통치한 건 누구일까요? 바로 무사정권의 두목, 쇼군(將軍)이 일본을 다스렸습니다. 덴노는 쭉 한 혈통을 이어갔지만, 쇼군의 무사정권은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여러 번 뒤바뀝니다. 이 시스템을 꼭 기억하세요. 일본은 상징적인 덴노, 그리고 실질적인 통치자인 쇼군, 두 시스템이 국가를 다스려 왔다는 걸요.
1830년대 일본, 당시 일본은 에도막부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였어요. 막부(幕府)는 간단히 말해서 쇼군이 이끌던 군사정권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리고 앞의 에도는 지역을 뜻했습니다. 에도가 지금의 도쿄예요. 정리해서 에도막부는 에도라는 곳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이죠. 일본 에도막부는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맺고 드디어 항구 문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1858년엔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맺고 미국에게 나라를 완전히 개방해주는데 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과 맺은 조약이 매우 불평등했던 겁니다.
예를 들어 미국 상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지질러도 일본이 처벌하지 못한다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던 겁니다. 일본인들은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이 에도막부란 정권, 도대체 왜 저리 외세에 비굴함을 보이나? 자존심도 없나?'라고요. 특히 어떤 계층이 격분했냐면 '사무라이'계급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무라이라면 보통 칼 들고 씨우는 무사로 알고 있는데, 에도막부 후기에 와서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에도막부는 약 260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평화의 시기였어요. 전쟁이 없으니 사무라이들이 월급을 받고 관공서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공무원이 하는 일들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사무라이 세습이었어요.
1830년, 조슈번이라는 지방에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라는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에도 말기, 불만 폭발 직전의 하급 무사 가운데서도 최하급 무사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연히 어릴 적부터 에도막부 정부에 대해 악감정이 있었겠지요. 무식한 에도막부 군사정권을 끌어내리고 원래의 군주인 일왕(덴노)을 모시자고 주장하는 겁니다. 양이(康夷)는 오랑캐를 물리치자, 일본에 눈독 들이는 서양 세력을 물리치자는 말입니다.
또한 쇼인은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정한론'을 주장해요. 말 그대로 우리 한반도를 삼한(마한, 진한, 변한) 이라고 보고 그곳을 정벌해야 한다. 서구 세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선 본래 일본 땅이었던 조선을 정벌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치기 위해선 먼저 다케시마, 즉 독도를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요시다 쇼인은 급진적으로 에도막부를 뒤집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이 과격분자는 에도막부에 검거되어 1859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처형을 당합니다. 요시다 쇼인이 처형당한 후 이토 히로부미 등 그의 수제자들은 스승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 주고 이를 바득바득 갈아요. ‘이놈의 에도막부! 가만 놔둘 수 없다. 스승님의 한을 풀어 드리자' 하고 나중에 메이지 유신이라는 구데타를 일으키죠.
조슈번 출신의 급진 하급 사무라이들은 결심합니다. 에도막부를 무력으로 엎을 수밖에 없다고요. 그래서 1868년 무진년에 '왕정복고' 즉 군사정권을 해제하고 일왕을 다시 실질적인 일본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에도막부와 전쟁을 벌였어요. 하급 사무라이들과 에도막부 군사정권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죠. 무진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해서 ‘무진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이들의 쿠데타는 성공해요. 당시 일본 왕의 이름이 ’메이지 덴노(明治天皇)'였기 때문에 이 쿠데타를 '메이지 유신'이라고 불러요. 여기서 유신(維新)이란 표현은 결국 ‘새롭게 한다' 즉 '옛것을 없애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다'라는 말이죠.
메이지 유신은 성공했어요. 에도막부 군사정군은 무너지고 교토에서 허수아비 역할을 하던 일왕(덴노)는 도쿄로 모셔져 와서 일본의 진짜 군주가 됩니다. 여기서 집권을 한 진보적 급진 하급 사무라이 세력들은 논쟁을 벌였어요. 서구 열강들과 손절한 후 일본만의 고립주의로 갈 것인지, 아니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본도 근대화해야 할지 하는 고민이었죠. 결국 일본 신정권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서양과 같은 근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선 근대국가의 기초인 헌법이 일본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 헌법을 기초로 하여 1889년, 일본 최초의 서양식 헌법인 '대일본제국 헌법'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신 일본 헌법을 기초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첫 총리 자리에 올라요. 이토 히로부미가 요시다 쇼인을 진정한 은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테지요. 이토히로부미는 정말 하급 중에서 완전 최하급 사무라이 출신이었거든요. 원래 에도막부의 계급상으로 출세는 꿈도 못 꿀 처지였는데 계급 타파를 외쳤던 요시다 쇼인이 적극적으로 키워줘서 초대 총리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니까요.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진보 사무라이 세력은 정말 무시무시할 속도로 서구 문물을 흡수합니다. 기초부터 탄탄하게 시작했어요. 일본은 당시 조선이나 청나라 등에서 서구 군사 기술 등만 수입해오는 무늬만 근대화 쇼를 하는 동안, 일본은 정말 기초부터 나라를 다 뜯어고쳤어요. 덴노 아래에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말을 토대로 신분, 계급 철폐 그리고 전 국민 의무교육 실시했죠. '서구 열강 100% 따라 하기'를 외치며 교통, 산업, 군사, 교육, 금융 모든 것을 서구화해 나갑니다. 청나라, 조선, 일본 가운데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빈 도화지가 물감을 더 잘 빨아들인다고, 일본도 백지상태에서 서구 문명을 '폭풍 흡수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서구 열강의 관심이 청나라 쪽으로 올인되어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서구 열강의 관심권에서 좀 벗어나 있었어요. 그걸 일본은 역이용한 것이죠. 남이 안 볼 때, 관심이 없을 때 국력을 폭풍 성장 시킵니다.
썬킴(필명) /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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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묘, 사무라이, 번의 개념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에도막부를 세운 이후로, 근세 일본은 200년 넘게 에도 막부의 지배하에 있었다. 막부 체계는 도쿠가와 가문의 근거지인 에도에 세워진 막부가 300명 정도의 지역 영주인 다이묘들 위에 군림하고, 또 각 다이묘가 많은 수의 사무라이들을 거느리고 번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봉건제였으며, 다이묘 밑으로는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를 이루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오랜 내란을 끝내고 확고한 지배체계를 구축하였고 조선원정 실패의 여파도 안정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에도 막부 시대 동안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 상공업이 번성하였으며 문화도 융성하였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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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과 군부
메이지유신 세력은 천황을 치켜세워준다고는 하지만 그들 역시 일본의 이전 권력자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천황을 이용해 메이지유신이 정당하다는 걸 강조하고 민중의 지지를 얻고 싶었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메이지유신 세력의 천황 마케팅은 상당히 잘 먹혀들었습니다. 큰 탈 없이 수많은 개혁이 시행되었고 일본은 엄청난 속도로 근대화를 이룩하게 되죠.
어느 정도 힘을 키운 일본은 이제 외부로 눈길을 돌립니다. 지난날 서구열강에게 탈탈 털리며 온갖 불평등한 조약을 맺어야 했던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구열강들과 똑같이 제국주의를 앞세워 확장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죠. 첫 타깃은 바로 옆에 있던 조선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이 바로 청일전쟁(1894년~1895년)과 러일전쟁(1904년~1905년)이죠. 각각 청나라, 러시아로부터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빼앗아오기 위해 벌인 전쟁입니다. 두 전쟁 모두 일본이 승리하자 당시 일본인들의 국뽕은 그야말로 치사량으로 차올랐죠.
'천황 폐하께서 정치를 시작하시니까 실제로 일본이 발전하고 있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 정부는 '천황께서 일본군을 각별히 돌봐주셨다'라는 내용을 담은 보도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점차 일본인들의 머릿속에서 일본이란 국가의 발전과 천황의 은혜는 동일시되기 시작했죠.
일본의 군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위기에 빠진 일본을 구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 결과 대륙에 진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리고 정부가 아니라 천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의회나 총리의 말 따위 듣지 않고 군인들 스스로가 멋대로 판단해 행동하기로 한 거죠. 그러나 천황은 군인들에게 직접적인 오더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무엇이 천황을 위한 일인지 자기 멋대로 생각해내고는 "천황을 위해!"라고 외치며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다 과거 메이지유신 세력이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천황을 신격화했던 선동의 후폭풍이죠.
예컨대 1931년 만주에서 벌어진 만주사변은 일본 군부가 천황과 총리의 오더도 없이 지들 멋대로 일으킨 전쟁이었습니다. 다짜고짜 중국 영토인 만주에 쳐들어가 아예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까지 세웠죠. 당시 일본 정부는 가뜩이나 경제도 어려운데 갑작스럽게 전쟁을 크게 벌이면 안 된다고 군부를 뜯어 말렸지만 군부는 정부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무능하니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정말 지들 멋대로 행동했죠. 1932년에는 일본 정부를 몰아내고 새로운 군부 정권을 세운다면서 현직 총리를 암살하는 일 (5.15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1936년에도 군사봉기 (2.26 사건)가 일어났죠.
일본 군부 : "천황 폐하 주변에 간신배들이 너무 많다. 싹 다쳐내라!"
일본 군부는 천황을 팔아먹으며, 혹은 이게 정말로 천황을 위한 일이라고 믿으며 도쿄를 헤집어놓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천황은 그런 혼란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천황은 쿠데타를 일으키는 군부를 향해 "나대지 말고 원대로 복귀하라"라고 명령했죠. 천황 핑계를 대며 봉기를 일으킨 만큼 군인들은 천황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죠. 결국 군부의 쿠데타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일본 정치계에서 일본 군부의 목소리가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애초에 언제든 군부가 민간정부를 뒤엎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고, 민간정부는 더 이상 만주사변과 같이 군부가 해외에서 일으키는 전쟁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으니 말이죠. 결국 세월이 흘러 정치인과 재벌들이 군부의 암살을 두려워하며 정치권력을 내놓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군부가 정치권력까지 장악해버린 일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객기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동맹을 맺고 제2차세계대전(1939년~1945년)을 일으키더니,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폭격(1941년)까지 감행하며 잠자는 사자의 코털까지 건드린 겁니다. 사실상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군부는 집단 세뇌에 빠진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국제 정세나 미국을 비롯한 해외 각국의 입장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천황'이라는 종교적 망상에 빠져 '천황폐하의 안녕'을 위한답시고 '천황 폐하의 앞길을 막는 악마'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열심히 노력하면 불가능해 보이는 난관도 다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은 것 같죠.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군부는 심지어 항복할 타이밍도 놓쳐버립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천황은 히로히토, 즉 쇼와 천황昭和(재위1926년~1989년)이었습니다. 정치 전면에 잘 나서지 않았던 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과 달리 쇼와 천황은 천황 말이라면 끔뻑 죽는 군부를 옆에 두고 있었죠. 천황은 군부를 통해 전쟁의 세부사항을 보고받았고 웬만하면 군부가 알아서 하게끔 놔뒀으나 때때로 군부에 지시를 내리는 모습도 보이죠.
일본 역사에서 천황은 대부분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천황 일가 이외의 가문이나 정치 세력들 간의 권력쟁탈전이 일본사 대부분을 채우고 있죠. 그러다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일본이 개항하게 되면서 오랜 세월 구석에 처박혀 있던 천황이 갑자기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자며 등장한 새로운 정치 세력들도 결국은 천황을 자신들의 집권을 위한 도구로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일본정치가 엉망이 되고 광기에 물든 일본 군부가 폭주하고 나서야 천황은 얼떨결에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그러나 천 년 넘게 권력을 휘둘러본 적이 없는 천황은 갑자기 주어진 권력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법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일본 국민들의 목숨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해 일본을 패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군부의 결정들을 승인해주었죠.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수많은 국민들의 개죽음과 원자폭탄으로 인한 참상이었습니다.
효기심 / ‘권력으로 읽는 세계사, 한중일편’중에서
* 위 글 제목 ‘천황과 군부’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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