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아편전쟁에서 국공내전까지 / 중국 근대사

송담(松潭) 2021. 8. 29. 20:56

아편전쟁에서 국공내전까지 / 중국 근대사

 

 

< 1 >

 

 

바람 앞의 촛불 같은 광저우의 운명! 청나라 도광제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지요. 1841년 1월 27일, 도광제는 영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러나 영국은 그런 선전포고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계속 병력을 광저우 앞에 집결한 후 5월 21일, 광저우에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광저우는 불바다가 되고 잿더미가 되어버리죠. 경악한 청나라 조정은 즉각 영국과 협상을 요구했고 영국의 요구대로 홍콩을 넘기기로 합의해요. 1841년 5월 30일에 이뤄진 '광둥협정'이랍니다.

 

물론 홍콩은 다음 해인 1842년 난징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영국에 넘어갔어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광둥협정 체결 순간부터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광동협정으로 홍콩을 손에 넣은 영국은 여전히 뭔가가 성에 차지 않았어요. 겨우 홍콩 하나라니. 좀 더 뜯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청나라를 굴복시키는 작전에 새로운 강경파 사령관을 보냅니다. 바로 헨리 포팅거라는 인물입니다. 나중에 홍콩의 초대 총독이 되는 인물이지요. 1841년 8월 10일, 새로운 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광동협정’ 무효를 선언합니다.

 

1841년 8월, 영국군 1만 명은 군함으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길목에 있는 상하이 등 도시들을 다 쳐부수며 중국의 경제 수도인 난징 바로 앞까지 몰려갑니다. 난징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중국은 바로 백기를 듭니다. 그리고 1842년 8월 29일, 두 나라는 난징에서 조약(명칭만 조약일뿐 영국의 협박 문서에 서명하는데 이것이 바로 '난징조약' 입니다. 난징조약 체결로 인해 중국은 홍콩 이외에도 상하이를 포함한 5개 항을 강제로 개항하는 굴욕을 겪습니다.

 

아편전쟁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었지요. 마약인 아편을 팔기 위해 한 나라의 정부가 나선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편전쟁 이후 홍콩은 1997년, 중국에 반환될 때까지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됩니다. 그리고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영웅이 된 헨리 포팅거는 홍콩 제1대 총독으로 취임해요. 홍콩에 ‘포팅거 거리'라고 부르는 길이 있는데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로죠. 포팅거 거리에 웬만한 홍콩 맛집이 다 모여 있기도 합니다.

 

하여간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자존심이 구겨진 건 물론이고 청나라는 정말 거지꼴이 됩니다. 특히 영국과 격전이 불어졌던 광동성의 상황은 최악이었어요. 폐허가 된 마을, 수많은 난민들, 여전히 아편중독 상태인 관리들까지 있어서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 2 >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孫文)의 등장

 

 

위기의 중국을 구해줄 혁명가가 등장합니다. 아편전쟁으로 나라가 초토화되었고, 또 태평천국의 난이 중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든 이후 1866년, 중국 남부 광둥성에서 쑨원(孫文)이란 인물이 태어납니다. 지금도 대만과 중국 본토에서 '국부(國父)'로 칭송을 받는 바로 그 쑨원입니다. 중국 난징에 가면 쑨원의 무덤인 '중산릉'이 있어요.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무덤에 ‘릉(陵)'을 붙이는 건 중국에서 황제와 왕에게만 가능했답니다. 쑨원의 무덤에도 '릉'을 붙였다는 건 중국인들에게 쑨원은 이미 왕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죠.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쑨원은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어요. 그러다 1871년 친형이 소작농으로 일하고 있던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서 인생이 피기 시작했어요. 하와이에서 서구식 교육도 받고 기독교도 접하게 되죠.

 

쑨원은 홍콩으로 가서 서양식 의대에 진학합니다. 그리고 1892년에 의사 면허를 따지요. 그런데 쑨원이 홍콩에 머물면서 가만히 중국 상황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홍콩은 이미 영국 식민지가 되어 점점 별천지가 되어 가는 시기였어요. 그런 홍콩에서 접한 중국 본토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동포들, 썩어빠진 만주족의 청나라 황실, 이런 중국을 서로 뜯어먹기 바쁜 서구 열강까지, 지옥 그 자체였던 겁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를 거의 뭉개버리자 쑨원은 결심하게 됩니다. '만주족의 청나라를 뒤집는 혁명을 일으키자' 라고요. 수술용 메스 대신 권총을 잡은 겁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직후 쑨원은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만의 공화국을 세우자'란 취지에서 '홍중회'라는 혁명 단체를 결성해요. 중국을 흥하게 하는 조직'이라는 뜻이죠. 1895년 쑨원은 자신의 고향인 광저우에서 청나라에 대항하는 첫 무장봉기를 일으키지만 내부자 비밀 누설 등으로 처절하게 실패하고 말아요. 그 뒤로 우선 일본으로 피신하고 미국, 영국 등을 떠돌며 객지 생활을 하기 시작하죠. 쑨원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쑨원의 중심 사상인 '삼민주의(三民主義, 삼민은 민족, 민권, 민생을 일컫는다)'을 서서히 만들어 나갑니다. 잠시 그 뜻을 설명하자면, 민족은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자, 민권은 더 이상 황제나 왕 따위는 필요 없으니 민주주의를 만들자는 뜻이고, 민생은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쑨원은 전 세계의 차이나타운을 돌면서 현지 화교들에게 자신의 혁명 계획에 대한 연설을 하고 기부금을 모읍니다. 그리고 혁명 자금을 더 모으기 위해 채권을 발행해요. 즉 '나를 믿고 돈을 좀 빌려주시오. 혁명을 성공시킨 후에 꼭 몇 배 이상으로 갚겠소'라는 말이었죠. 쑨원의 진심을 믿어준 수많은 이들이 채권을 사줍니다. 이렇게 쑨원이 해외를 돌면서 중국 혁명을 준비하고 모금 활동을 하던 중에 본토에서 큰일이 벌어집니다.

 

신해혁명, 중화민국이 탄생하다

 

1911년 10월 10일, 봉기를 일으키죠. 혁역명군의 거센 진격 앞에 당시 우창을 담당하던 청나라의 관리는 도주합니다. 그렇게 우창이 혁명군의 손에 들어갑니다. 지금도 대만은 이 10월 10일을 '쌍십절(雙十節)이라 부르면서 대만 건국 기념일로 기리고 있답니다. 십(十)이 두 개 있다는 말이죠. 1911년 10월 10일 봉기를 시작으로 300년 청 왕조 타도를 목표로 한 '신해혁명' 이 시작됩니다. 1911년이 신해년(辛亥年)이었기 때문이지요. 쑨원도 미국에서 모금 활동을 벌이다 우창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91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중국 민중의 대대적인 환호를 받으며 상하이를 통해 중국으로 귀국합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혁명군 대표들을 모아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국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 성립을 선포하고 ‘임시 대총통' 자리에 오릅니다. 현재 대만도 총통이 나라를 다스리죠? 총통은 우리의 대통령과 같은 자리랍니다. 영어로도 대통령, 총통 둘 다 'president 입니다. 중화민국 성립 선포가 바로 신해혁명이 완성되던 순간이었죠. 아시아 최초 의 공화국이 탄생한 순간이기도 하고요.

 

위안스카이, 쑨원의 뒤통수를 치다

 

신해혁명은 '반쪽 혁명'이었답니다. 베이징의 청나라 조정이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었으니까요. 쑨원은 '어찌하면 북쪽의 만주족 청나라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해요.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픽션을 가미하긴 했지만, 이 시기의 청나라 상황을 담은 영화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푸이', 즉 선통제라는 어린 꼬마였습니다. 황제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위안스카이 (원세계)란 인물이 실질적으로 권려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쑨원은 고민하다가 위안스카이에게 제안합니다. 만일 당신이 청나라의 마지막 숨통만 끊어준다면, 즉 마지막 청나라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국을 지지해준다면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 자리를 당신에게 내어주겠다고요. 말했듯이 쑨원은 '임시 대총통'에 올랐지 정식 총통 자리에 오른 건 아니었어요. 위안스카이는 이게 웬 굴러온 떡이냐 싶어서 바로 쑨원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황제 푸이를 자리에서 끌어내립니다.

 

1912년 2월 13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오늘부로 퇴위하겠다는 선포를 합니다. 지난 3,000년 동안 왕이 대륙을 지배해온 군주제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로써 청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과의 약속대로 중화민국의 정식 대총통 자리에 오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위안스카이란 인물은 중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배신자가 됩니다. 중화민국 총통 자리에 오른 위안스카이는 슬슬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권력을 혼자서 차지하기로 작심 한 것이죠. 그리고 1913년이 되자 중화민국 내 친 쑨원 세력을 모두 숙청하고, 쑨원과 함께하는 정치세력의 정치활동을 불법화합니다. 심지어 쑨원 세력의 중심지인 난징도 공격합니다. 쑨원도 이런 상황에서 가만있을수 없었기에 위안스카이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지만 패하고 맙니다. 결국 1913년 12월, 쑨원은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위안스카이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또 넘습니다. 1915년, 공화제도를 없애고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면서 또 다른 황제의 나라 '중화제국'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황제가 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한창 1차 대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차 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됐고,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오른 건 1915년이니까요. 그때 영국과 동맹이던 ‘연합국' 일본이 갑자기 산둥반도에 있던 칭다오 등 독일의 조차지를 무력으로 점령합니다. 1차 대전 당시 일본은 영국편이었고 영국은 독일과 싸우고 있으니까, 일본에게도 독일은 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산둥반도는 적국인 독일의 식민지니까 연합국 일본이 차지하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였어요. 위안스카이 정부는 항의했지만 일본은 '위안스카이 정부를 지지한다. 그리고 위안스카이 정부에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라는 말로 위안스카이 정부를 유혹했어요. 돈 앞에 장사 없다고 위안스카이는 산둥반도의 이권을 일본에 넘기게 됩니다. 이 일은 나중에 중국 근대사를 뒤흔드는 핵폭탄급 사건의 계기가 됩니다.

 

전국적인 반(反)위안스카이 운동에 결국 위안스카이도 꼬리를 내립니다. 황제 제도는 없었던 일로 하게 된 거죠. 1916년 3월, 군주제를 취소한다고 발표한 후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화병으로 급사합니다. 한 나라의 황제 자리까지 올랐던 인물의 허망한 죽음이었죠.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중국은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립니다. 무주공산의 권력자 자리를 놓고 10여 개의 파벌 간의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면서 실질적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혼란은 무려 10년간 계속됩니다.

 

 

< 3 >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

 

 

1918년, 독일의 참패와 함께 1차 대전은 막을 내립니다. 중국도 전쟁이 끝나기 한 달 전,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을 선언했어요. 비록 진짜 총 들고 전투를 한 건 아니지만요. 형식적으로나마 중국도 승전국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답니다. 중국은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비록 일본이 억지로 차지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독일 식민지’인 산둥반도 등이 중국으로 반환될 거라 기대한 겁니다. 독일은 전쟁에서 졌고 중국은 형식적으로나마 승전국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한창 1차 대전이 진행 중일 때, 위안스카이와 일본이 ‘독일령이던 산둥반도를 일본에게 넘겨준다'라고 몰래 약속한 사실이 다른 나라에도 퍼집니다. 다른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등 모두가 일본 편을 들어주기 시작하면서 산둥반도는 그냥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갑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진 겁니다.

 

중국 민중들은 들고일어납니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몰려온 대학생들이 ‘치욕적인 비밀 협상으로 우리 중국 땅 산등반도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 것을 규탄한다!'라고 외치면서 대규모 반일 시위를 펼칩니다. 바로 중국의 '5·4운동' 입니다. 베이징에서 시작된 이반일 시위는 상하이, 난징 등 중국 전역으로 번지는데요. 같은 해인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 조그만 나라인 조선도 일본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데 우리 중국은 뭘 하고 있었나, 우리도 맞서야 한다고 외치며 반일 운동에 나선 것이지요. 중국 전국| 200여 대학들의 동맹 휴교, 노동자들의 지원 파업 등 중국 전체는 운동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5·4운동이 중요한 의미는 이렇습니다. 중국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지식인, 노동자, 농민이 하나로 뭉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운동이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당, 중국공산당을 창당시킨 원동력이었다는 점입니다.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는 운동의 이름을 딴 5 · 4 광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광장 가운데 붉은색 횃불 모양의 모형물이 서 있습니다. 칭다오를 표현하는 동시에 5·4운동을 기리는 상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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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등장

 

 

5·4운동 이후, 쑨원은 다시 중국으로 귀향합니다. 그는 골몰했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순진했어. 내가 군벌들한테 당한 건 확실한 파벌이 없어서였지. 강력한 정치활동을 위해서는 정치 세력화가 필요해' 라는 생각으로 1919년, ’국민당'을 창당합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의 한 학교 기숙사에서 13명이 모여 하나의 정당을 만듭니다. ‘수천 년 동안 군주제에 핍박받아온 중국의 노동자, 농민이 주체가 돼서 세상을 바꿔보자'라는 취지로 중국공산당이 탄생합니다. 정말 초라하고도 미약한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13명 중에는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게 되는 청년, 그 유명한 마오쩌둥(毛澤東)이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상태였어요. 쑨원이 다시 돌아와 국민당을 창당했지만 그의 세력은 겨우 남쪽 자기 고향 광둥성 정도밖에 안되었답니다. 참고로 쑨원은 중국 표준어를 쓰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이 광둥성이라서, 우리가 홍콩영화를 보면 들을 수 있는 광둥어를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중국 북부는 어땠을까요? 위안스카이가 죽고 난 후 그의 부하들이 군벌을 만들어서 베이징을 비롯한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쑨원은 또 고민해요. 북벌을 해서 저 군벌세력들을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해야 하는데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쥐어짜냈죠.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당시 급격하게 세를 불리고 있던 중국공산당이었습니다. 공산당은 농촌 지역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고 있었어요. 노동자, 농민을 해방시켜준다고 하니 어떤 농민이 싫어할까요. 쑨원은 이렇게 세력을 불리고 있던 공산당과 손을 잡고 북벌을 하면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해요. 그래서 쑨원의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힘을 합쳐 북벌하자! 베이징을 해방시키자'라고 외치며 손을 잡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웠던 1924년 1월의 '제1차 국공합작' 이랍니다. 1차 국공합작으로 안 그래도 세를 엄청 불리고 있던 공산당의 몸값은 하늘로 치솟습니다. 쑨원의 국민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는 인정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공산당과 손을 잡은 쑨원의 국민당은 군사를 체계적으로 훈련하기 위해서 군사학교를 세웁니다. 오합지졸로 베이징을 점령할 수는 없으니까요. 1924년 6월, 쑨원의 고향인 광저우에 황포군관학교를 만들죠.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당시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조선의 독립투사들도 대거 입학한 곳입니다. 의열단을 만든 악산 김원봉도 이 학교 출신이지요. 이 황포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제스(補介石)가 취임합니다. 일본 군관학교 출신 전문 군인이있죠. 중국 근대사를 뒤흔들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 순간이었습니다.

 

1차 국공합작으로 북벌을 위한 모든 준비가 다 끝났던 1925년, 쑨원은 갑작스러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러했습니다. "아직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는데..." 쑨원이 죽고 나서 공백이 된 국민당 권력을 두고 다툼이 생깁니다. 그리고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었던 장제스가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쑨원의 권력을 계승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장제스는 공산당을 싫어하는 반공주의자였습니다. 또한 권력을 자기 혼자 독식하고 싶었지요. 중국 대륙의 권력을 공산당과 반으로 나누기 싫었던 겁니다. 쑨원이 북벌을 위해서 공산당과 손을 잡은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었던 장제스는 집권을 하자마자 본격적으로 공산당과의 '손절'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른바 청당(淸城) 작업이었는데, 말 그대로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 동조 세력을 청소해버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공산당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상하이를 기습 공격해서 상하이의 공산당원, 추종세력을 모조리 소탕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하이 최대 폭력조직까지 동원하는 치졸함을 보여요. 이것이 바로 장제스가 주도한 1927년 ‘4.12 상하이 대학살'입니다. 상하이 시내에서만 1만 명이 넘는 공산당원이 장제스군에 의해 목숨을 잃습니다. 장제스는 상하이 쿠데타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 전역에서 공산당원 숙청 작업에 들어갔는데 최대 3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답니다. 당연한 결과로 1차 국공합작은 깨지고 본격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시작됩니다. 이른바 중국의 ’국공내전‘의 시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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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통일한 장제스, 그리고 마오타이주의 탄생

 

 

장제스는 생각했어요. 베이징에 남아 있는 군벌을 다 물리칠 수 있다고요. 굳이 공산당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 혼자 힘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만큼 자신만의 단독 군사력에 자신감이 있었던 거죠. 공산당과 손잡을 필요도 없다고 판단하게 되고요. 그래서 북벌이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상하이, 광저우 등지에서 무자비한 기세로 공산당 탄압에 나섭니다. 장제스의 판단은 맞았습니다. 1928년, 장제스의 군대는 공산당의 도움 없이 남에서 북으로 치고 올라가 베이징에 입성하고, 남아 있던 베이징 군벌 세력을 물리칩니다. 청나라가 망한 후 아수라장이었던 중국이 장제스에 의해 통일된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중국도 통일이 된 마당에 장제스 입장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눈엣가시였던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들어갑니다. 당시 공산당의 근거지는 강서성(江西省)이란 곳이었어요. 장제스는 그 공산당 근거지를 포위해서 공산당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로 합니다. 1934년이 되어 장제스는 50만의 병력, 200여 대의 전투기로 총공세에 들어갑니다. 철저하게 이중 봉쇄까지 해서 탈출 퇴로를 막는 치밀함까지 보였어요.

 

마오쩌둥이 이끌던 약 10만 명의 홍군(공산군에서 이름을 바꿨습니다)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합니다. 모두 걸어서 포위망을 뚫고 여기서 탈출하자는 계획이었죠. 중국사 최대의 도보 탈출 작전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상황은 1931년에 일본이 이미 무력으로 만주를 침공한 상태였기든요. 그러면 일단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후 공산당 토벌이든 뭐든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장제스는 정말 이상한 결정을 합니다. ‘내부의 적을 먼저 없앤 후 외부의 적을 처리하자'라는 논리를 주장하죠. 심지어 ’일본군이 피부병이라면 공산군은 심장병이다'라는 형이상학

적 헛소리까지 하면서 공산당 토벌에 집착합니다.

 

홍군은 이제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합니다. 앉아서 개죽음을 당할 순 없으니까요. 1934년 10월, 강서성을 탈출한 홍군 10만 명은 1935년이 되도록 1년 넘는 기간 동안 무려 18개의 산맥과 17개의 강을 건넙니다. 총 1만 2,000킬로미터를 행군한 겁니다. 태평양 전쟁 편에서 말했던 것처럼, 일본은 만주를 침공한 뒤 중국의 반격이 없어서 의아해했죠. 중국 상황이 이렇게 극에 달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는 말든 장제스의 목표는 오로지 공산군 소탕뿐이었습니다. 홍군이 걷고 또 걷는 행군을 하다가 지쳐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을 때 귀주성(貴州省)의 한 마을에 도착했어요. 홍군은 마을 주민들이 내어준 전통주를 마시고 깜짝 놀랍니다. 이런 술맛은 처음이었거든요. 술로 상처 난 부위도 소독하고 다시 힘을 얻어 행군을 시작했답니다. 이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이후, 그때 마을에서 마신 술을 회상하며 고마워했다고 해요. 그 술이 아니었다면 대장정이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술을 중국의 국주(國酒)로 명명합니다. 그 마을 이름이 바로 ‘마오타이(茅台)'였고 홍군이 마셨던 그 고마운 술이 바로 마오타이주(茅台酒)입니다.

 

 

부하에게 납치당한 장제스 시안사건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는 등 이미 중국이 침공당하던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오로지 공산당 토벌만 외쳤죠. 중국 곳곳에서는 이러한 장제스의 행동을 규탄하는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심지어 같은 국민당 내부에서도 공산당과의 내전 중지하고 일본과 먼저 맞서 싸우자라는 의견이 나왔죠. 결국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의 부하였던 장쉐량(張學良)이라는 국민당 부사령관이 잠자던 장제스를 납치해서 감금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중국에 시안이라는 곳이 있는데요.. 진시황릉도 있고 병마용도 있는 역사적인 도시죠. 우리에겐 당나라의 수도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여기에 화청지(華淸地)라는 곳이 있는데 당나라 때 양귀비의 별장이었답니다. 지금도 유명한 관광명소고요, 장제스가 감금된 곳이 이곳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12:12 시안사건(西安事變))이라고 부릅니다. 상관인 장제스를 납치했으니 당연히 하극상이었죠. 이런 일이 생길 정도로 장제스의 고집은 위험했던 겁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공산군이 아니라 일본군을 먼저 공격하겠다'라는 약속을 하고 풀려납니다.

 

자존심이 다 구겨진 장제스는 억지로 공산당과 다시 손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홍군이 대활약하기 시작해요. 홍군이 대장정을 시작했을 때는 10만 명이었지요.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1만 명밖에 남지 않았어요. 다 죽거나 도주한 상태였지요. 그만큼 힘든 여정이었답니다. 하지만 남은 1만 명을 보자면, 그들은 별의별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이들입니다. 그 때문에 최강의 전사로 변모한 상태였습니다. '전투 머신'이 된 1만 명의 홍군은 대륙을 침공한 일본군을 정말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게릴라전을 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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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대만으로 떠난 장제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원자폭탄 2발을 맞고 태평양 전쟁에서 패합니다.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고 중국은 ‘중일전쟁'이 종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손을 잡았던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계속 손잡고 같이 갈까요? 아닙니다. 공동의 적이 사라졌으니 다시 서로를 적으로 두고 싸워야지요. 일본이 사라진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대륙의 패권을 놓고 마지막 혈전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전력이 뒤졌던 공산당의 홍군이 서서히 국민당군을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어찌된 일이냐면,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중국민중들의 민심을 얻으며 전쟁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은 휘하 홍군 병사들에게 철저히 명령을 내립니다. ‘절대 민간인들의 재산을 훔치지 마라. 무언가 신세를 지면 꼭 갚아라' 등등. 심지어 '잠자리를 빌렸다면 꼭 아침에 나올 때 이불을 개고 나와라'라는 세심한 명령까지 했답니다. 청나라가 망한 후 정말 아수라장이 된 중국에서 소외되고 희생만 강요받았던 농촌의 농민들, 도시의 노동자들은 이런 마오쩌둥의 지도력에 감동을 받습니다. 스스로 홍군에 참여하는 젊은이들도 서서히 늘어갔어요. 마오쩌둥의 홍군이 온다는 소식에 성문을 먼저 열어주는 마을도 생겨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지원군, 바로 '민심'이 마오쩌둥의 공산당 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겁니다. 중일전쟁이 끝나고 겨우 100만이었던 홍군은 200만의 대군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반면 장제스는 계속 민심이 떠나갈 일만 벌였어요. 1938년, 일본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남하를 시작하자 일본군을 '수공(水攻)'으로 막는다면서 황하의 댐을 일부러 폭파시킵니다. 그런데 일본군은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주변에 살던 중국인만 100만 명 가까이 홍수 때문에 사망하고 1,2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홍수가 난 곳은 하남성이라는 지역이었는데, 논밭이 다 물에 잠겨 이후 엄청난 대기근의 원인이 됩니다.

 

또 장제스의 국민당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이후에 폐허가 된 중국 경제 재건을 시작했어야 했어요. 당시 중국의 합법 정부 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공산당부터 때려잡자' 라는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피해복구는 내팽개치고 내전을 계속해요. 전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을 무수히 찍어내고요. 시장에 돈이 너무 넘쳐 나면 어떤 일이 발생하죠? 네, 인플레이션(intlation) 현상이 옵니다. 그야말로 돈의 가지가 ‘휴지'가 되는 것이죠. 도시의 노동자들은 월급도 받지 못했고 안 그래도 거지골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상거지가 됩니다. 민심이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1949년 1월, 민심 잃은 국민당군을 압도하기 시작한 마오쩌둥과 그가 이끄는 홍군이 드디어 베이징에 입성합니다. 4월에는 국민당의 거점이었던 난징까지 점령합니다. 같은 해 10월 1일에는 마오쩌둥이 베이징 천안문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합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고 판단한 장제스는 중국 대륙의 금괴와 국보급 보물들을 대만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중국의 모든 보물은 베이징의 국립박물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만 타이페이의 국립박물관에 있답니다. 장제스가 망하기 전에 빼낸 것이조, 그리고 12월 7일이 되자 장제스는 미 해군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쓸쓸히 대만으로 탈출합니다. 다음을 기약 했지만 다시는 대륙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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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막지 못한 사랑

주문용, 진철군 부부

 

 

처형 직전 결혼 사진

 

 

장제스의 상하이 대학살 소식은 광저우까지 전해집니다. 격분한 광저우의 공산당원들은 국민당을 상대로 한 반격을 준비했어요. 1927년 12월 11일, 광저우 지역의 공산당원, 농민, 노동자 약 300명이 국민당의 무자비한 탄압에 항거하며 국민당사 점거 등 무력행사를 합니다. 공산당 결사대 20명은 치열한 교전 끝에 국민당 공안국 교도소를 점령하고 수감자들을 탈출시켰어요. 그리고 광저우 시내 곳곳에 ‘근무시간 8시간 보장! 노동자 임금 인상!' 등의 포스터까지 내걸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광주기의(廣州起義)'라고 부르는 광저우 공산당 봉기입니다.

 

그러나 국민당군은 당시 광지우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미국, 영국 해군의 도움을 받아 공산당원들을 진압합니다. 당시 검거된 공산당원 중에는 20대 초반의 앳된 주문용, 진철군이라는 청년도 있었어요. 둘은 위장 부부로 행세하며 국민당에 맞서 싸우다가 검거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국민당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요.

 

1928년 2월 6일, 사형 집행의 날이 왔습니다. 총살형을 앞두고 집행관이 둘에게 물었습니다. ‘마지막 할 말은 있는가?’라고요. 그때 남편 역할을 했던 주문옹이 마지막 소원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옆의 이 여자와 위장 부부로 살아왔지만 죽을 때만큼은 진짜 부부로 죽고 싶다. 마지막으로 결혼사진 한 장만 남기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국민당은 이를 허락하고, 둘은 형장의 이슬이 되기 전 철창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결혼사진 한 장을 찍게 돼요. 그리고 주문용은 하늘을 보고 외칩니다. ‘이제 곧 울릴 국민당군의 총성은 우리 결혼을 축하해주는 예포다!’라고요. 이 부부의 추모 동상은 지금도 중국 광저우 시내에 있답니다. 광저우는 시내 곳곳이 중국 근대화 혁명의 유적지로 가득 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썬킴 /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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