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는 지금도 죽은 자들이 살고 있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 유해가 고국에 돌아왔다. 언론은 영웅의 귀환과 함께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보(勝戰譜)를 펼쳐보였다. 언제 들어도 가슴 뛰는 불멸의 순간들. 청산리 대첩이 없었다면 독립전쟁은 참으로 초라했을 것이다. 김좌진, 이시영, 최운산, 이상룡, 지청천, 이범석…. 이들은 간도의 별이다.
옛 기억 속 간도에서는 독립군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렸다. 그 말발굽이 어린 마음을 흔들었다. 조선인 마을은 가난하지만 정갈했다. 자작나무를 태워 저녁을 짓고, 냇내가 가시면 별들이 내려와 반짝였다. 학교에서는 윤동주 시인이 이국 소녀들과 같은 책상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이육사 시인이 광야에서 목 놓아 울면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만주벌판을 질러 내려올 것이라 믿었다.
아직도 간도라 하면 많은 이들이 이런 상상을 할 것이다.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은 복잡했지만 간도의 항일전투는 명쾌했다. 비록 마적 떼가 몰려다니고 이리 울음에 밤하늘이 얼어붙어도 그곳에 가고 싶었다. 또 우리가 잃어버린 아련한 것들이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간도를 눈여겨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간도는 통곡의 땅이었다. 특히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경신년(1920년)은 지옥이었다. 일본군은 패전의 보복으로 조선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조선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나 죽였다. 간혹 튀어나오는 당시 현장의 사진만 봐도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난징 대학살 훨씬 전에 ‘간도 대학살(경신참변)’이 있었다. 독립군의 무공(武功)이 누리를 덮었지만 그로 인해 양민들이 죽어야 했다. 나라 없는 백성이라 주검조차 제대로 세지 못했다. 희생된 수만명 중에서 겨우 3500명 정도만 확인했을 뿐이다.
간도는 글자 그대로 ‘사이(間)에 있는 섬(島)’이었다. 청나라가 개국을 하며 여진족의 발상지라 해서 봉금령(封禁令)을 내렸고, 이후 줄곧 청과 조선 사이에 있는 무인지대였다. 1860년대에 대흉년이 들자 굶주린 조선 백성들이 몰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조선이 망한 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건너갔다. 그럼에도 조선 사람에게 간도는 여전히 ‘사이의 땅’이었다. 나라가 없으니 중·일·러시아 사이에 존재해야 했다. 민족의 한과 눈물이 고여 있는 외로운 섬이었다. 1917년 5월에 발행된 ‘매일신보’는 간도에 조선인 30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조선 팔도의 백성들이 모여 작은 조선, 새 조선을 이루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로 미루어 1920년에는 조선인이 30만명도 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외국 신문 기사를 인용하여 간도 학살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국혼(國魂)이라며 붓끝에 힘을 주었던 박은식도 그 참상을 서술할 때는 분노와 슬픔을 가누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같은 내용들을 반복해서 나열하고, 곳곳에 신음과 탄식이 배어있다. 아마 떨리는 손으로 써내려간 후 다시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혈사(血史)라 칭했으니 끔찍해도 옮겨본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어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병사들은 사람들을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앉게 하고 칼로 마구 찔렀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너무나 힘껏 찔러 칼이 두 동강 났다고 한다.”
우리 역사는 간도 대학살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혹시 ‘사이의 역사’로 묶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승전의 위대함과 영웅들의 무용담이 바랠까봐 귀퉁이에 적어놓고 적당히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둠에 묻힌 자들을 일으켜 세워야 제대로 된 역사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고 했다. 역사의 어두운 골짜기를 살피라는 잠언일 것이다.
죽은 자들은 간도의 어딘가에서 육신은 땅이 되고 이름은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사무친 원한은 100년이 지났으니 세월에 바스러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향에 오지 못하고 있다. 청산리 대첩은 간도 대학살과 함께 기억돼야 한다. 홍범도 장군이 돌아왔으면 경신참변의 희생자들도 돌아와야 한다. 이 땅 어디에도 간도의 바람이 내려와 머물 곳이 없다. 지금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특별기여자’로 맞이하여 정성껏 돌보고 있다. 그 따뜻한 가슴이라면 능히 간도의 비극을 품을 수 있다.
김택근 시인·작가
(2021.9.4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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