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에서 류성룡으로부터
서원은 존현양현(尊賢養賢), 즉 훌륭한 선현을 기리고 올바른 유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사립 교육기관입니다.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일을 배향(配享)이라고 하는데, 서원은 그 배향 인물이 살았거나 공부했던 연고지 근처의 조용하고 경치 좋은 장소에 세웁니다. 그래서 서원을 방문하는 것은 누군가의 고귀한 삶과 정신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풍경과 건축을 감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의 하나로 손꼽히는 안동 병산서원으로 떠나 서원의 구조와 의미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국정총책임자로 행정과 외교 및 군사를 총괄하며 국난 극복을 지휘했던 류성룡 선생을 만나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1543년에 세워진 백운동서원입니다. 나라가 인정하여 운영을 지원하는 사액서원 제도가 도입되자 서원은 점차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한때 수백 개까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비리가 발생하고 폐단이 심해지자, 조선 말기에 흥선대원군은 47개의 서원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철폐해 버립니다. 이런 암흑기를 지나 오늘날까지 서원이 그 역사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성현의 뜻을 이어받으며 한국 정신문화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2019년 유네스코는 병산서원을 비롯한 9곳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합니다.
서원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성됩니다.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영역, 유학을 교육하여 유학자를 길러내는 강당 영역, 그리고 서원을 관리하는 주사 영역입니다. 여기서 사당이 강당보다 전면에 있는 구조를 전묘후학 , 반대의 경우를 전학후묘 라고 부릅니다.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사당입니다. 그래서 서원이 경사지에 건축되는 경우, 보다 높은 후면에 사당을 두는 전학후묘 구조를 따랐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서원의 대부분이 이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병산서원을 향해 길어가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외삼문의 이름은 복례문입니다. 이는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간다는 뜻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위엄 있는 공간의 입구에 세우는 솟을삼문 형식이지만 좌우 통로는 막아 놓았고 중앙 통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 칸으로 되어 있는 문을 삼문이라고 부르는데, 중앙 칸이 높으면 솟을삼문이고 세 칸의 높이가 동일하면 평삼문입니다.
입교당 마루에 앉아 만대루를 바라봅니다. 만대루와 병산 그리고 낙동강의 모습이 겹쳐 보이며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만대루 지붕 위로 병산의 푸른 빛이 넘어 들어오고, 지붕과 마루 사이로는 나동강 물길과 백사장의 풍경이 스며들어옵니다. 이런 극적인 경관은 정교한 건축 계획에 따라 만대루가 적절한 위치에 적당한 높이와 형태로 지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만대루의 기둥은 액자가 되어 풍경을 일곱 프레임으로 나누어 줍니다. 이를 일곱폭 병풍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창이나 기둥 사이로 끌고와 즐기는 것을 차경(借景)이라고 하며, 경치를 빌려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경 기법은 우리 전통 건축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서원을 나와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낙동강 강변을 천천히 걸어 봅니다. 오직 자연의 소리만이 들려오는 고요한 시간입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 하류에는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하회마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회마을 맞은편 부용대 아래에는 류성룡선생이 삶의 마지막을 보내며 징비록을 집필했던 옥연정사가 있습니다.
류성룡은 1542년에 태어났습니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일찍부터 뛰어난 실력으로 유명했던 그는 25세 때 대과에 합격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28세 때에는 인종의 신주를 모시는 일에 대해 영의정 이준경의 의견을 반박하기도 하면서 학문과 능력을 인정받았고 한꺼번에 6품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됩니다. 이후 핵심 요직을 거치며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당쟁 국면에서는 남인의 영수로 정세를 주도했습니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하는 인재관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순식간에 한양이 위험해지자, 공포감에 사로잡힌 선조는 신하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의주로 피난한 후 여의치 않으면 명나라로 넘어가려는 임금의 뜻에 대해 류성룡은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안 됩니다. 임금의 수레인 대가(臺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이후 류성룡은 영의정과 전시 총사령관인 도체찰사를 겸임하며 전란극복을 주도합니다. 마침내 7년간의 기나긴 전쟁이 끝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반대 세력들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주화오국 즉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주장까지 동원된 정치 공세와 맞물려, 그의 정치적 이용 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한 선조는 결국 류성룡을 파직합니다. 류성룡이 파직당하던 그 날 그 시각에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쟁인 노량해전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쓸쓸하게 하회로 옵니다. 이후 그를 다시 부르는 임금의 요청을 거듭 사양하며 정치와 거리를 두던 류성룡은 생의 과업에 뛰어들었는데, 바로 왜란의 경과와 대처 방법을 정리하고 미래 세대에게 전쟁의 교훈을 위해 「징비록」을 집필하는 것이었습니다. 징비(懲毖)란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뜻입니다. 책을 완성한 지 3년 후, 그는 66세의 나이로 눈을 감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그에 대한 평가를 보면 능력과 업적은 극찬하고 있지만, 도량이 줍고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대신으로서 절개가 없었다고 하면서 그의 성품을 평가 절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물평은 차라리 인신공격에 가까운데, 이는 당시 실록이 반대 당파의 집권 시절에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러한 평가가 결코 정당하지 않았음을 중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한양에 전해지자 3일 동안 정사와 시장 운영을 증지했는데, 많은 백성이 선생의 서울 옛집에 찾아와서 슬퍼했고 상인들은 자발적으로 하루 더 철시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기 때문입니다. 훗날 정조임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헐뜯는 사람들을 당시의 시대에 처하게 하고 류성룡이 맡았던 일을 하게 한다면, 백 명이 있더라도 그가 한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했겠는가.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한 거인의 뜻이 있었다.
한여름이 되면 병산서원은 붉은 배롱나무꽃으로 가득 찹니다. 백일 동안 붉은 꽃이 핀다고 해서 목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배롱나무는 오랫동안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지조를 상징하고 나무의 겉과 속이 일치하는 모습은 내외합일을 연상시키기에 예로부터 선비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했던 류성룡 선생의 마음도 병산서원의 배롱꽃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던 뜻깊은 여행이었습니다.
< 2 >
한양도성에서 정도전으로부터
고려 말은 친원과를 비롯한 권문세족의 횡포와 폭정으로 나라가 기울어가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들이 정계에 진출하며 국가개혁을 추진합니다. 이들 개혁파의 선두에는 정몽주와 정도전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유교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는 같이했으나, 그 방향과 속도에 대해서는 서로 생각이 달랐습니다. 보다 급진적이었던 정도전은 친원 정책에 반발하다가 유배에 처해집니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비참한 백성의 삶을 목격하며 새로운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당대 최고의 영웅인 이성계를 찾아갑니다. 두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고, 고려와 조선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에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성계와 정도전은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후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정몽주가 사라지자,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마침내 새로운 세상을 향한 정도전의 꿈이 이루어집니다. 그는 법률, 행정, 재정, 국방 등 모든 분야에서 조선의 국가 체계를 세워나가며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 되는 민본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국가 통치 규범으로 편찬한 「조선경국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는 것이니,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이다.
그에게 맡겨진 또 다른 임무는 새 도읍지 한양을 설계하는 것이었습니다. 경복궁과 종묘사직 등의 국가 시설을 건설하고 도성을 수축하며 도로와 행정구역을 정비하는 등 정도전은 한양의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합니다. 그는 완성된 한양을 감격에 젖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새 도읍지로서 지세와 경치가 빼어나도다
나라를 세운 성스러운 왕께서 태평성대를 이룩하셨도다
도성답도다 지금 이 모습이 참으로 도성답도다
임금이 만수무강하시니 모든 백성의 기쁨이로다
그는 지속적인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혈통으로 세습하는 군주에 의한 왕권 정치보다 탁월한 재상을 발탁하여 정치를 맡기는 신권 정치가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형들을 제치고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도록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되고 정도전은 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됩니다.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 정도전을 반란을 기도한 역적으로 격하시켰고 역설적으로 정몽주를 본받아야 할 충신의 표상으로 드높입니다. 이후 조선 역사에서 정도전의 이름 앞에는 항상 간신이라는 말이 따라붙게 됩니다.
정도전 선생의 명에는 47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회복됩니다. 고종 때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그를 복권시켰고 문헌공이라는 시호도 내립니다. 오늘날 평택 진위에 있는 봉화 정씨 마을에는 선생을 기리는 문헌사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는 조선이 건국된 지 겨우 6년 만에 나이 60살을 넘기지 못하고 스러져 갔지만, 그가 설게하고 구축한 국가 체계와 민본사상은 오랫동안 살아남아 조선을 지탱해 왔습니다. 훗날 고종 임금은 이런 편액을 내려 정도전을 드높이기도 했습니다.
유종공종(儒宗功宗)
유학으로도 으뜸이고 공적으로도 으뜸이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봄여름이면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경치를 구경하는 순성놀이를 즐겼습니다. 순성을 하루 안에 끝내면 길한 일이 생긴다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하늘과 바람이 좋았던 5월 어느 날, 옛사람들처럼 순성놀이를 하다가 인왕산 성곽에 걸터앉아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았습니다. 600년 전 이 도성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한 혁명가를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여길우/ ‘우리 땅 더 넓고 더 깊게 여행하는 방법(출판 : 여행이 필요한 시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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