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

송담(松潭) 2019. 7. 31. 12:39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

 

 

 

 

 

 

저는 가끔 강연 중에 청중에게 묻습니다. 인생의 화두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져요. 대답은 세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젊은 사람의 화두는 취업이나 연애고, 중년은 자녀 혹은 내 집 마련에, 좀 더 나이가 든 분들은 건강에 관심을 가져요. 정의나 평화, 나눔과 같은 가치를 화두로 꼽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마다의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고자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평생을 다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으면 대부분 쉽게 답하지 못합니다. 사랑도, 돈도, 다른 목표도 다 중요하지만, 정말 내 삶을 던질 만큼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려우니까요. 아마 그런 생각을 해본 사람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이걸 이룰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을 바쳐도 좋다!' 이렇게 말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입니다.

 

 이런 주제가 나올 때마다 제가 꼭 소개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육입니다. 김육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이분에 대해서는 짧고 굵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대동법의 아버지' 더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만큼 대동법 시행에 온 힘을 쏟은 인물입니다.

 

 대동법이란 쌀로 세금을 내는 제도예요. 당시 백성이 내는 세금은 크게 세 종류가 있었습니다. 각각 전세, , 공납이라고 했는데요. 전세는 토지에서 생산한 것의 일부를 내는 거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소득세 같은 것입니다. 역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거예요. 요역은 국가에서 궁궐을 짓거나 길을 만들 때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고, 군역은 군대에 가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거고요. 어찌 보면 지금도 존재하는 세금 형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공납입니다. 공납은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거예요. 백성들에게는 공납이 굉장히 큰 부담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공납 때문에 괴로워하니까 수수료를 받고 공납을 대신 내주는 대행업자까지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을 방납업자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방은 '막을 방()' 자예요. 공납을 막아준다는 거죠. 방납업자들이 사또에게 사례비를 주는 거죠. 그 돈을 당시에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인정(人情)' 이라고 했어요. "너 왜 이렇게 인정이 없냐?" "사또, 이게 다 인정입니다." 이랬던 거예요.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뜻하는 말이지만, 저는 인정이라고 하면 부정부패가 떠오릅니다. 이 인정 때문에 백성들이 죽어났어요.

 

 대동법은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이었습니다. 그냥 쌀로 세금을 내자는 거예요. 그때의 쌀은 화폐랑 똑같았어요. 조정에 바칠 양을 채우기 위해 이 집, 저 집 개수를 할당할 필요도 없어요. 백성들 입장에서는 무척 반가운 내용이죠. 그런데 대동법이 특히 혁명적이었던 건 토지에 부과된 세금이라는 점이에요. 공납은 집집마다 부과되는 것이라 누구나 다 내는 것이었다면 대동법은 토지 한 결마다 세금이 매겨져 땅을 가진 사람만 세금을 내게 하는 제도였어요. 토지가 없거나, 적게 소유하고 있던 일반 백성에게는 감세인 반면 넓은 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에게는 증세였던 셈이죠.

 

 이 법안이 시행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조정 대신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통과시킬 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공납으로 인한 문제가 극심해져서 결국 광해군은 경기도에서만 대동법을 시행하기로 합니다. 사실 광해군은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왕은 기본적으로 선대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경기도에서만 대동법을 시행한 것도 영의정 이원익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결과입니다.

 

 경기도에서만 시행되던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무려 100년이 걸립니다. 한 세기가 흐른 거죠. 그 긴 시간 동안 대동법 확산을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이 바로 김육이에요.

 

 김육은 1580년에 태어났습니다. 김육이 열두 살 때 임진왜란이 터져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10대에 소년 가장이 됐는데 곧이어 어머니도 돌아가십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과거에 합격해 스물네 살에 성균관에 들어갔어요. 4년이 지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김육을 비롯한 성균관 유생들은 청종사오현소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렇게 다섯 명의 학자를 문묘에 모시자는 내용이었어요. 당시 북인의 수장이었던 정인홍은 이를 반대했고, 광해군은 정인홍 편을 들어줬어요. 심하게 반발한 성균관 유생들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총학생회 환동을 했던 김육도 대과 웅시 자격을 빼앗겼지요. 높은 관직으로 나아갈 방법이 없어진 거예요.

 

 영창대군이 살해되는 등 조정에 혼란이 더해지자 김육은 성균관을 박차고 나와 귀농해버립니다. 가족을 데리고 가평의 잠곡이라는 곳으로 갔어요. 벼슬도 잃고 부모도 없으니 무슨 돈이 있겠어요. 집 지을 돈도 없어서 땅을 파고 움막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년을 고생한 후에야 겨우 집을 마련했다고 해요. 그러고는 숯 장사를 합니다. 나무를 태워서 숯을 만든 다음 한양으로 가져가서 팔았어요. 가평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자그마치 80킬로미터입니다. 왕복 160킬로미터를 걸어다녔던 거예요.

 

 이쯤 되면 보통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겁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쫓겨나고, 벼슬길은 아예 막혔고, 숯을 팔아 겨우 먹고사는 생활이었잖아요. 꼬일 대로 꼬인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김육의 눈에 들어온건 자신의 처지가 아니었어요. 그보다 더 비참한 백성들의 처지였어요. 매일 한양을 오가면서 봤던 거예요. 굶어 죽은 시신이 거리에 널려 있는 걸 보면서 김육에게는 좌우명이 하나 생깁니다. '애물제인(愛物濟人)' 만물을 사랑하여 사람을 구제하자는 뜻입니다. 공납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 시기였어요. 직접 노동하고 세금을 내면서 제도의 모순을 절실하게 느낀 것이죠.

 

 잠곡에서 10여 년의 시간을 보낸 뒤에 김육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세상이 바뀐 거죠. 광해군 때는 블랙리스트였던 김육에게 곧바로 관직 제의가 옵니다. 관직생활을 하는 내내 김육의 주 관심사는 공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관직이 낮아서 그럴 만한 힘이 없었어요. 문제 해결에 나서기 위해서는 고위 공무원이 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과거 시험을 또 봅니다. 결과는 장원이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최종 시험에는 현실 문제에 대책을 논하라는 문제가 나오거든요. 김육이 쓴 답은 책만 달달 외운 사람들의 답과 차원이 달랐을 거예요.

 

 이제 뭔가 좀 되려나 보다 싶은 그때 또다시 전쟁이 터집니다. 호란이 일어나요. 얼마나 파란만장한 인생입니까. 10대에 전쟁, 20대에 투쟁, 30대에 귀농, 40대에 다시 전쟁. 김육이 제대로 정치 생활을 시작한 건 50대가 되어서예요. 전쟁이 끝나고 정세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바로 대동법 이야기를 꺼냅니다.

 

 김육은 대동법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대동법 확대 시행을 끊임없이, 정말 끊임없이 주장했어요. 반대로 양반들은 대동법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열을 올렸죠. 전세는 토지 1결당 쌀 4~6두를 내는데, 대동법은 1결당 12두를 부과했어요. 땅을 가진 사람 입장에서는 전세의 두세 배나 되는 부담을 추가로 지는 거니까 세금 폭탄이라며 난리를 친 거죠. 그러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백성들이 대동법을 불편해한대요. 요즘 정치인들도 그러죠. 정책을 얘기할 때 국민을 들먹이면서 이건 안 된다 저건 안 된다 그래요. 실은 자기들 이익을 챙기려고 그러는 것인데 국민 핑계를 댑니다. 김육은 이런 관리들에게 버럭 화를 내요.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오직 모리배들뿐입니다!" 하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번 논쟁을 해도 대동법 확산의 길은 멀기만 했습니다. 인조가 사망하고 70세의 나이가 된 김육은 새로 즉위한 왕 효종에게 사직 상소를 올립니다. 효종은 업무 능력이 뛰어난 김육을 붙잡았습니다. 결국 김육은 효종이 자신의 사직상소를 일곱 번이나 물리치고 계속 벼슬을 내리자 조건을 내겁니다. 대동법을 확대 시행해주면 일을 하겠다고 한 거예요. 이렇게까지 나가니까 드디어 충청도에도 대동법이 시행됩니다.

 

 호서대동법이 시행되고 김육이 어떤 말을 했는지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인터뷰 같은 건데요.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말에 김육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학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줄어서 너무 기분이 좋다." 백성이 배고픈데 무슨 학문이 필요하냐는 거예요. 성리학이며 양명학이 무슨 소용인가, 백성이 잘살면 최고지. 이것이 바로 그의 사상이었습니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닙니다. 호서대동법이 시행되자마자 이번에는 대동법을 전라도까지 확산시키기 위해 김육은 또 상소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대동법이 왜 시행되어야 하는지, 전라도가 왜 중요한지,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쭉 써서 올리는 거예요. 전라도가 최고의 곡창지대이지 않습니까? 전라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면 게임 끝이거든요. 금방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어요. 그러나 양반들 입장에서는 경악스럽죠. 그 어마어마한 토지에 세금을 물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들이 완강하게 버티다 보니 또 시간은 흘러만 갔습니다.

 

 70세에 사직 상소를 올렸던 김육은 79세에 유언 상소를 올립니다. 자기가 죽으면 대동법 시행이 취소될까 봐 너무 두렵다는 겁니다. 이제 병들어 곧 죽을 몸이 되었으니 호남에도 빨리 시행해달라고, 김육은 효종에게 마지막 간청을 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아픈 몸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끝까지 백성을 걱정했을 겁니다. 김육은 평소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일, 바로 만물을 사랑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인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애물제인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고 꾸준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해답에 목말라 있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조언을 듣고 때로는 직접 부딪쳐가면서 답을 구합니다. 저는 김육이 '한 번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자신의 일생으로 답했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분이죠.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나에게는 삶을 던져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가?'를 고민해보는 거예요. 그리고 '삶이 뭐다 그렇지'라는 말 대신 '삶은 이런 거지' 라는 말로 바꿔봤으면 합니다. 그런 귀중한 목표를 찾아가는 과정만으로도 우리의 하루는 이전보다 더욱 충만하게 채워질 테니까요.

 

 최태성 / ‘역사의 쓸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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