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송담(松潭) 2017. 1. 30. 21:33

 

 

 

 

 

 

 

 

 

 

임금조차 볼 수 없었던 가장 내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은 총 2,077책으로 이루어진 기록물입니다. 한 책의 두께가 1.7인데, 이것을 차례로 좍 쌓아 올리면 무려 아파트 12층 높이가 되는 양이에요. 하루에 100쪽씩 읽어도 43개월이란 긴 시간이 흐른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에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랍니다.

 

 다른 나라에도 실록과 같은 기록물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문덕황제실록, 삼대실록이 있고요. 중국에는 대명실록과 청실록이 있지요. 하지만 중국, 일본, 베트남의 실록은 주로 왕실에서 일어난 정치 내용만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조선왕조실록은 민초들의 다양한 삶까지 기록하고 있어요. 그리고 왕이 생존했을 때 만들어지지 않고, 승하하고 난 뒤에 편찬이 시작되지요.

 

 임금이 승하하면 춘추관에서는 실록 편찬을 위한 임시 관청인 실록청을 만들고, 이곳에서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시정기(時政記), 상소문, 개인 문집 등과 같은 여러 자료를 모았어요.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 취급한 문서와 왕명의 전달 등을 정리해서 기록한 일기이고요. 사초는 사관이 임금이 말할 때, 기침하고 화낼 때, 심지어 화내고 눈물 흘리는 것까지 옆에서 속기한 걸 다시 정리한 기록이랍니다. 또 시정기는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 등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외에도 일반 선비부터 재상까지 왕에게 간언했던 상소문도 포함되고요. 그런 다음 실록청에서는 역대 선왕들과 관련된 모든 사료를 모아 함께 의논합니다. 그렇게 뺄 것은 빼고, 더 넣을 건 넣어서 종합 편집해 만든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통 왕조국가의 특징이 아버지, 아들, 손자 순으로 왕위를 이어가니, 혹여 우리 아버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쓰지 않았을까? 업적을 폄하하지 않았을까?’하는 의혹과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왕들은 실록청에 실록을 보여 달라고 했지요. 하지만 임금이 선왕의 기록을 본다는 건 실록의 중립성을 훼손하는 의미랑 같잖아요. 따라서 사관들은 절대로 왕이 선왕의 실록을 볼 수 없게 했답니다. , 조선왕조실록은 임금조차 볼 수 없었던 , 말 그대로 국가기밀문서였던 것이지요. 실제로 몇몇 왕들은 기를 쓰고 이를 보고자 했지만, 사관 신하들이 목숨 걸고 막았다고 합니다.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 VS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

 

 

 비슷한 말 같지만 엄연히 다르답니다.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똑똑하기만 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히틀러 무지 똑똑해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공격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토 히로무비도 똑똑해요.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나요? 절대 나니지요. 그들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을 나열해 봅시다. 역사적으로 훌륭한 사람, 누가 떠오르나요? 세종, 조선후기의 정조, 이순신 장군.... 이들을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애민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종은 한마디로 애민군주라고 부를 수 있지요. 세종은 모든 업적은 오롯이 백성에 대한 사랑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는 과전법(科田法)이라는 법을 시행했는데요. 이 법은 관리들에게 일정한 땅을 경작하게 한 후, 수확물의 10분의 1을 줘요. 바로 이런 권리를 수조권(收租權)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관리들이 자기 마음대로 10분의 1보다 더 많이 가져가는 거예요. 이런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법적으로 차등을 둬 거둬들이는 공법을 시행하는데 조선 최초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거예요143035일부터 610일까지 5개월 동안 무려 173,000여 명이 참여하고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일일이 사람을 시켜 물어보는 방식을 택합니다.

 

 무릇 가하다는 자는 98657인 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4149명입니다.

세종실록 49, 12(1430) 810

 

 세종신록에 의하면 원래 관노비의 출산휴가는 7일 정도였다고 해요. 하지만 세종은 노비들에게 100일의 추산휴가를 허하노라또한 출산 1개월 전부터 일을 하지 않도록 해줍니다.

 

일찍 100일간의 휴가를 더 주게 하였다. 그러나 산기가 임박하여 복무하다가 몸이 지치면 곧 미처 집까지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다. 만일 산기에 임하여 1개월간의 복무를 면제해 주면 어떻겠느냐.”             세종실록 50, 12(1430) 1919

 

 

< 2 >

 

 어떤 것은 실록이고 어떤 것은 일기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조선왕조에서는 쫓겨난 임금에 대해서는 실록대신 일기라고 이름을 붙인답니다. 일기의 주인공은 쫓겨난 왕이기 때문에 왕자로 강등되어 훗날 ()’이라 불리게 되지요.

 

 조선시대에 쫓겨난 왕은 몇 명일까요? 일반적으로 두 명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만, 사실 총 세 명입니다. 연산군, 광해군, 그리고 단종은 폐위되면서 노산군이라고 부렸지요. 그런데 노산군의 경우는 진짜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조선 후기 숙종 때 단종으로 추존되면서 노산군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 3 >

 

 사림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건국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봐야 해요. 당시 새로운 신진세력으로 신진사대부가 있었지요. 이때, 신진사대부는 아예 나라를 새로 만드느냐, 점진적으로 개혁해나가느냐로 파가 갈립니다. 완전히 뒤집어엎고 나라를 만들자는 사람들은 급진파 사대부이고요, 정도전이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이러한 급진파 사대부에 입장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정몽주입니다. 그런데 이방원에 의해서 정몽주가 죽지요. 이때 온건파 사대부 중에서 길재와 같은 이들이 대거 고향으로 내려가요.

 

 이 상황에서 조선은 건국되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정도전과 급진파 사대부는 개국공신이 되지요. 이들은 마땅히 훈장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훈구파라고 불러요. 당연히 태종 이방원을 도와 왕자의 난에 가담했던 사람들, 세조를 왕으로 만들었던 사람들도 훈구파가 되지요. 특히 세조와 예종 시기(15세기)에 집권세력으로 훈구파가 크게 성장합니다.

 

 이와 달리 지방에서는 온건파 사대부들이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성종(9)이 이들을 중앙으로 대거 등용해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대간의 역할을 맡긴거지요. 성종은 이들을 통해 훈구파를 견제할 참이었던 겁니다.

 

 즉, 성종 때 사림파들이 대거 중앙으로 등용되면서, 김종직을 비롯한 여러 문인은 당시 언론 3사에 기용되어 훈구파를 격렬히 비판합니다. 이로써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던 훈구파는 사림파에 의해 견제를 받게 되지요.

 

< 4 >

 

 정조는 신하들과 자주 대화를 하며 다양한 주재로 토론합니다. 또한 지방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자 하지요. 정조 이전에도 왕이 백성들과 소통하는 제도는 있었어요. 이미 태종 때부터 신문고 제도가 있어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생기면 북을 울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신문고는 궁궐 안에 있었어요. 이는 임금이 직접 백성들의 억울함을 듣겠다는 게 아닌 그저 백성과의 소통의 의지를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물건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유명무실해진 신문고를 대신해 16세기 중엽부터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성행해요. 격쟁이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꽹과리를 치며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는 제도입니다.

 

 글을 아는 선비나 신하들이야 상소라는 문서를 통해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지만, 당시 백성들은 글을 알지 못했어요. 따라서 격쟁은 백성들이 자신의 억울한 일을 임금에게 직접 하소연할 수 있는 효과 만점의 제도였던 거지요.

 

 임금의 행차는 선대왕의 능을 방문하기 위한 거였지요. 능행을 하는 가운데 백성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정조는 17772월부터 18003월까지 66번의 행차를 했으니, 연 평균 3회지요. 할아버지 영조조차 연 1, 많아야 2회 정도였다는 걸 보아 정조가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얼마나 힘쓴 왕인지 알 수 있어요.

 

 정조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이 어린아이라고 해도 막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1779810, 효종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살곶이(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서 격쟁하는 어린아이와 마주칩니다.

저희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돌아올 때가 넘었는데 아직도 오지 않고 계세요. 빨리 돌아오게 해주세요.” 이 이야기를 들은 정조는 신하들에게 어떤 일인지 알아보고 속히 처리하도록 명합니다.

 

 “10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 앞에 긴장하는 기색없이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모습이 감동을 주는구나. 낮고 미천한 이들 가운데 이렇게 똑똑한 아이가 있을 줄 몰랐으니, 매우 가상하다. 네 사정을 들으니 불쌍하고 안타깝구나. 이는 조정에서 마땅히 처분하겠다.”

 

 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기에 격식을 어기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러한 이유로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일성록(日省錄), 정조 3(1779) 811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은 정조는 3일 이내에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신속한 처리가 곧 신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요.

 

 

< 5 >

 휘()와 묘호(廟號)

 

 임금의 이름을 휘()라고 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감히 휘를 부르거나 사용하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휘가 두 글자라면 사용해서는 안 되는 단어가 늘어날 것이고 그만큼 백성들이 일상 생활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겠지요. 그래서 임금의 이름을 한 글자로 만들기로 한 겁니다.

 

 묘호(廟號)는 왕실 제단인 종묘에서 모시는 신주(죽은 사람의 이름, 날짜 등을 적어 모시는 나무패)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후세에는 가장 널리 알려진 임금의 이름이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생전에 알 수 없었습니다. 묘호는 죽고 나서 받는 이름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묘호입니다. , 왕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이름이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왕들의 이름인 거지요.

 

 

 조()와 종()

 

 보통 나라를 세운 왕을 태조라 하고, 이에 버금가는 업적을 새운 왕을 태종’, 제도와 문물을 완성시킨 왕을 성종이라고 합니다. , 나라를 세운 창업군주는 를 쓸 수 있고, 이후의 왕들은 태조의 종통을 계승한 것이므로 이라고 쓰는 게 원칙이에요.

 

 하지만, 종통을 계승하지 않고 왕위 계승권 밖에 있던 자가 임금이 되면 입승왈조(入承曰祖)라고 해 를 씁니다. 세조, 인조가 그런 경우지요.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조와 종이 변칙적으로 사용됩니다. ‘보다 높은 표현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예를 들어 선조의 경우 원래는 선종이었는데, 그의 아들인 광해군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높여 부르겠다며 선조로 바꿔요. 그리고 영조, 정조, 순조도 원래는 영종, 정종, 순종이었지요. 하지만 후대인 철종, 고종 대에 바뀌게 되지요.

 

 

< 6 >

  

- 왕의 재위기간

   1위 영조(52), 2위 숙종(46), 3위 고종(44) .... 26위 예종(1), 27위 인종(9)

 

- 나이 차이가 가장 많은 왕과 세자 : 영조 사도세자(41세에 얻은 늦동이)

- 나이 차이가 가장 많은 왕과 왕비 : 영조(66) 정순왕후(15)

 

 

설민석 / ‘조선왕조실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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