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려와 조선, 편년체와 기전체

송담(松潭) 2019. 2. 25. 05:56

 

고려와 조선, 편년체와 기전체

 

 

 역사를 기술하는 전통적 방법에는 편년체(編年體)와 기전체(紀傳體)라는 것이 있다. 편년체는 그냥 연대순(chronological order)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편년체 서술의 대표적인 것이다. 중국고전에는 노나라의 역사, 춘추春秋가 편년체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니까 '실록'은 실상에 가까운 사건들의 나열이라는 양식을 취할 뿐 아니라 매우 자세하다는 것이 특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하여 기전체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기(本紀)’, 세가(世家), (), (), , 열전(列傳)등의 독립적 카테고리를 만들어 그 카테고리의 양식에 따라 독자적으로 기술하여 연합체를 형성한 것이다.

 

 정도전의 고려국사로부터 출발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된 고려사는 편년체가 아닌 기전체의 역사기술이었는데, 그 이유인즉 기전체는 역사의 다양한 측면들이 독자적으로 유기체적인 단위를 형성하기 때문에 방대한 자료의 체계화가 쉽고, 해석의 여지가 넓어지기 때문에 포폄의 가치판단이 자연스럽게 개입된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역사를 왜곡하기가 편년체보다는 기전체가 쉬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전체라는 말에서 열전列傳(biographies)’을 말하는 것이므로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런데 앞에 있는 라는 말은 본기(本紀)와 세가(世家)를 압축한 말이다. 사실 이 부분이 기전체 역사기술의 핵심이 되는 본체인데 여기에는 본기세가의 두 카테고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기라는 것은 "천자국의(앞서 말했듯이 천자는 본래 왕으로 불리었다) 역사"이며 "세가"라는 것은 제후국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나라의 역사는 본기가 될 수 없고 세가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게 된다.

 

고려사라는 책을 펼 적에 일차적으로 우리가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은 고려제국 전체가 본기本紀"에 들어가지 않고, “세가(世家)”로 처리되었다는 이 통탄스러운 사실에 있다.

 

 삼국사기라는 책을 펼치면, "신라본기新羅本紀"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온다. 우리가 김부식을 아무리 사대주의자니 운운하지만, 그는 최소한 신라, 고구려, 백제를 제후의 나라가 아니라 천자의 나라로 본 것이다. 그것은 그가 고려제국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3국을 본기라는 카테고리에 넣은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인식체계를 반영한 것이다. 제국의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뿌리를 제후국으로 인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의 편찬자들은 "고려라는 막대한(고려의 강역은 북간도·서간도 지역을 다 포섭한다. 고려의 강역을 "한반도라는 터무니없는 개념 속에 우그려 처넣은 것은 이병도사학류의 최대 실책이다. 고려사 자체만 전후맥락을 따져 정직하게 읽어도 그런 오류는 범할 수 없다), 막강한 제국을 변방의 일개 제후국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고려가 세가라면 도대체 고려시대 때 본기"는 무엇이 될까?

 

 하여튼 고려를 세가"에 집어넣은 조선유자들의 속셈은 새로 건설한 이성계의 조선왕조가 철저히 명이라는 천자의 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의 전제를 천명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코 그 당시 호족세력(라이벌 그룹)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효율적 수단이었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으나, 우리가 요즈음까지 부르고 있는 정선 아리랑의 가사, “눈이 올 올리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등에도 이성계의 조선창업에 반대한 고려유신들의 정조(情調)가 반영 된 것이라고 하니, 당시 정도전-이성계의 혁명에 저항한 세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송도 두문동에 숨어 지내던 고려유신들이 정선으로 은거지를 옮기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맹세하며 여생을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았다고 한다. 고려왕조에 대한 흠모, 두고 온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롭고 고달픈 심정을 한시로 읊었는데 후에 세인들이 이를 풀이하여 부른 것이 정선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정선아리랑은 최소한 6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는 모든 아리랑의 프로토타입으로 간주되고 있다. “세파에 시달린 몸 만사에 뜻이 없어 홀연히 다 떨치고 청려를 의지하여 지향없이 가노라니 풍광은 예와 달라......” 이러한 서정적 가사가 조선왕조혁명 그 자체에 대한 부정적 정서를 토로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고 있는가?

 

 하여튼 고려국사(1395년 성립)를 쓴 정도전은 삼십년래근고업 三十年來勤苦業, 송정일취경성공松亭一醉竟成空"(삼십년 긴 세월 근근이 쌓아올린 고된 금자탑, 송현의 정자 술 한 잔에 끝내 허공으로 돌아가고 마는구나)이라는 시 한 구 남기고 이방원의 칼에 버히고 만다(1398년 음826, 57). 물론 우리는 고려국사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실상을 자세히 상고할 길이 없다. 그리고 정도전만 해도 이후의 조선유학자들과는 달리 명태조 주원장을 우습게 알았고, 요동회복(사학계에서 쓰는 "요동정벌'이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남의 나라인 요동의 정벌이 아니라, 잠시 빼앗긴 고토의 회복일 뿐이다. 요동은 고구려의 고토로서 고려가 계승한 땅이다. 우리의 잘못된 관념은 고려사에 나오는 지명을 잘못 비정한 데서 비롯되는 픽션이다)을 획책했으며, 왕권중심보다는 재상중심의 새로운 형태의 왕조를 구상했다. 그래서 이방원과 충돌한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자기가 무너뜨린 고려에 대해서는 이미 틀을 왜곡해놓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정도전은 고려조가 남긴 사료를 새로 건국된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개조하고 날조하는 데 하등의 죄책감이 없었다. 고려의 위상을 일개 제후국으로 만들어야만 조선왕조혁명의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도올 김용옥 / ‘우린 너무 몰랐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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