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역사의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하여

송담(松潭) 2019. 7. 28. 16:26

 

역사의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하여

 

 

 

 

 

 

 조선의 성군을 꼽으라고 하면 보통 세종과 정조를 말합니다. 세종은 조선시대 전기를, 정조는 조선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임금이죠. 정조는 참 힘들게 왕이 되었습니다. 겨우 열한 살의 나이에 자기 아버지가 죽었는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다름 아닌 할아버지 영조예요. 어린 나이에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신하들이 이번엔 자신이 왕이 될까 봐 갖은 음모를 꾸몄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느라 고생했던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정치 개혁을 위해 애씁니다. 신하들이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세력을 키우려면 가장 먼저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세운 것이 규장각입니다.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은 사실 정조가 자기 사람을 키우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습니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관계없이 젊고 똑똑한 관료들을 뽑아서 규장각에 배치했는데, 이것이 바로 초계문신 제도입니다. 이미 과거에 합격한 사람 중 37세 이하의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하는 거예요. 개혁 정치를 함께하기 위해 재교육을 한 것이지요. 그중에는 박제가, 유득공 같은 서얼은 출신도 많았습니다. 정조는 신분보다 실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소위 '정조 라인'이 된 학자들은 규장각에서 역대 왕의 자료를 정리하며 개혁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중요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지요. 초계문신의 대표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은 정조가 키운 학자입니다. 그에게 정조는 스승이자 멘토였어요. 정조 또한 정약용을 총애했습니다. 정약용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이죠. 능력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정약용 같은 위인을 또 찾기가 어려울 거예요. 흔히 만능인이라고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꼽잖아요. 그런데 다산 선생이야말로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조선의 르네상스인이었습니다. 실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바탕은 유학에 있어 관련 서적을 여러권 집필하였고, 정치와 법, 의학과 지리학,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해 수원 화성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시인으로서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죠. 500여 권이 넘는 책을 썼으니 뛰어난 작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다양한 내기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낼 정도로 무척 가까웠습니다. 애주가인 정조가 술을 잘 못하는 정약용에게 일부러 술을 내리거나 활 솜씨가 없는 것을 알고 문무를 갖추게 한다며 활쏘기 연습을 시키는 등 짓궂은 장난도 서슴지 않았죠. 두 사람의 일화를 보고 있자면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넘어 정말 마음을 나눈 벗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다재다능한 정약용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종교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어요.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인데 정약용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었거든요. 한마디로 난리가 날 일인 것이죠. 정조는 그 사실을 모른 척했지만, 계속해서 올라오는 탄핵 상소를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정약용을 내치기로 합니다. 너무나 아끼는 신하지만 계속 붙잡고 있으면 오히려 정악용에게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거죠. 그래서 정약용에게 미리 언질을 줍니다. 내가 내일 호통을 치면서 너를 자를 거다. 그럼 우선 잘못했다고 해라, 물러나서 기다리면 내가 너를 다시 부를 것이다.

 

 정약용은 정조의 편지를 받고 물러납니다. 상심이 컸을 거예요. 정약용은 정조와 함께 일하는 걸 정말 좋아했거든요. 하지만 상황이 워낙 안 좋으니 어쩔 수가 없었지요. 관직에서 물러난 정약용은 왕이 다시 자신을 불러줄 날만 기다리며 지냈습니다.

 

 그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추측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요. 자신의 생가에 걸어 놓은 현판이죠.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쓰인 현판인데, 얼핏 들으면 '이제 좀 여유를 갖고 편하게 살겠다는 뜻인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실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글귀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이 글귀는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경계하라는 의미예요.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데 무엇 하나라도 트집을 잡아보려는 무리가 눈에 불을 켜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방을 경계하고 신중하게 하루를 보내라는 의미로 그런 글자를 써둔 거예요, 정약용은 매일 현판을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도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해야지.’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단속하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정조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보름 뒤에 너를 부를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어요. 얼마나 좋았겠어요. 청운의 꿈을 품고 약속한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겠죠.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거예요. 약속한 날을 딱 하루 앞두고요. 정조가 승하한 날이 정약용을 다시 부르기로 한 날의 바로 전날입니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정약용은 충격에 빠집니다. 얼마나 허탈하고, 또 슬펐을까요. 뒤이어 찾아온 감정은 바로 '공포'였을 것입니다. 정약용을 지켜주던 존재가 사라진 셈이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정조 승하 이후 신유박해로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당하고, 정약용 또한 유배를 갑니다. 자신은 이미 천주교와 인연을 끊었다는 간곡한 호소가 받아들여져 겨우 사형을 면한 것이었어요. 후에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가 일으킨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강진으로 유배지를 다시 옮기게 됩니다. 가문은 폐족이 되었지요. 자그마치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고, 그 뒤에 여유당으로 돌아와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그곳에서 일생을 마칩니다.

 

 정약용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으나 능력을 펼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외척이 날뛰고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판치는 세상, 인재를 알아주기는커녕 짓밟는 세상이 원망스럽지는 않았을까요? 저는 그게 평범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억울해요. 다산의 인생을 보면 제가 다 안타까워요.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고 정약용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실제로 펼쳤다면 조선의 향방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거죠. 행정, 토지 등 여러 제도가 개선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만약' 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그 정도로 뛰어났던 분입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나라를 탓하고 운명을 탓하며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쉽게 손가락질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을 해요. 바로 책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18년 동안 무려 500여 권의 책을 씁니다. 저는 한권 쓰는 일도 힘에 부치는데 말이지요.

 

 양만 많은 것이 아니라 분야도 방대합니다. 지방의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서인 목민심서, 제도의 개혁 원리와 방안을 다룬 경세유표, 형벌의 운영에 관한 『흠흠신서, 고조선부터 발해까지 역대 왕조의 영토를 연구한 아방강역고등이 대표적인 저서입니다. 이외에도 의학서, 어원 연구서, 시집, 풍수를 분석하거나 아이들을 위해 한자를 쉽게 가르쳐주는 책 등 몇 가지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다양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정약용은 복숭아뼈에 세 번 구멍이 났다고 해요. 양반다리를 하면 복숭아뼈가 눌리잖아요. 책상 앞에서 그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밤낮으로 글만 쓴 겁니다. 나중에는 복숭아뼈가 너무 아프니까 일어서서 선반 위에 책을 올려두고 공부하며 글을 썼대요.

 

 대체 왜 그랬을까요? 정약용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마치 기록에 미쳐 있는 사람처럼 글을 썼으니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약용의 답변이 있습니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 있어요. 마치 기계로 찍어내듯 책을 쓰는 와중에도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썼습니다. 귀양살이 중이니 자식과 함께 생활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편지로 자녀를 교육하고 애정을 전했지요. 공부의 중요성부터 사대부 예법, 일상의 지혜 등 세세한 내용이 담겨 있어요.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구를 사귈 때나 시를 쓸 때, 벼슬살이를 할 때, 심지어 술을 마실 때의 법도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둘째 형인 정약전과의 일을 추억하거나 막내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물려줄 재산이 없어 미안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중에는 폐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편지도 있습니다. 조상이 큰 죄를 지어서 그 자손들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집안을 폐족이라고 해요.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가문이 몰락한 상황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금방 나아질 거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폐족일지라도 선비의 기상을 유지하는 길을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폐족끼리 무리를 짓지 말 것, 과일과 채소를 키우고 뽕나무를 심어 가난에서 벗어날 것, 벼슬을 하지 못하더라도 벼슬하는 사람처럼 나라와 세상을 위해 살 것...... 그중에서도 핵심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해도 책은 읽을수 있으니까요. "폐족에서 벗어나 청족이 되려면 오직 독서한가지 일뿐이다"라고 했지요. 청족은 대대로 절개와 의리를 숭상해온 집안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한 정약용은 자신이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지금의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형조에 있는 죄목만 보고 자신을 죄인 정약용으로 기억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끊임없이 기록하겠다는 것입니다.

 

 출세의 길이 막혔다고, 죄인이 되었다고, 폐족이 되었다고 자포자기하여 손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형조에 기록된 몇 줄짜리 글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글을 남겨 후세의 평가를 받으려 했습니다.

 

 저는 정약용의 편지글을 보고 팔에 소름이 작 돋았습니다. ', 정약용은 역사가 무엇인지 알았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감탄이 터졌습니다. 능력이나 성품도 그러하지만, 저는 정약용의 역사의식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정약용은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죄인의 입장이지만 역사는 자신을 그렇게 기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쓰고, 또 썼던 것입니다.

 

 교과서를 한번 펼쳐보세요. 정약용이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죄인 정약용? 아닙니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정약용이 남긴 수많은 저서는 현대에도 활발히 연구되며, 학자는 물론 일반인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정약용이 200년 전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죠.

 

 저는 인생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정약용의 남양주 생가로 가곤 합니다. 여유당 현판 아래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요. 역사 속 인물과 소통하면 지금 당장 닥친 문제를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거든요. 역사라는 흐름 속에서 현재를 보게 되니까요. 마찬가지로 내 인생 전체에서 이 문제는 수많은 고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고난이 인생의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조급한 마음을 약간은 덜어낼 수 있어요.

 

 정약용의 고민과 제 고민의 내용이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핵심은 비슷할 거예요. 왜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 않을까?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까?

 

 그 답은 정약용의 삶에 있습니다. 정약용은 18년간 귀양살이를 했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18년을 보낸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때로는 비참하고 암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폐족이 되었음을 한탄하거나 힘든 세월을 그냥 홀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읽고 쓰는 일을 꾸준히 해나갔습니다. 그의 여생은 평화로워 보일지 모르나 어쩌면 삶의 마지막 투쟁이었을 겁니다. 역사를 알았기에 고난을 버티며 투쟁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당부대로 살았습니다. 둘째 아들 정학유는 농가월령가라는 유명한 가사를 지어 그 시대의 풍속이 담긴 귀한 자료를 남겼습니다. 큰아들 정학연은 70세가 되어 벼슬을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약용의 집안은 드디어 폐족을 면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당부했던 말을 전하며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최태성 / ‘역사의 쓸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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