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에 대하여
< 1 >
삼국지의 배경은 2~3세기입니다. 서양에서는 예수님 탄생 200여 년이 지난 시점, 우리나라도 삼국 시대를 형성할 무렵, 그리니까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자 한창 세를 넓혀 가고 있을 때지요. 삼국지의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l 우선 중국의 역사를 가볍게 훑어보고 가겠습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이 진시황이라는 건 다들 잘 알지요? B.C. 221년, 진이란 나라를 세웠으며 황제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했다 해서 진시황이라고 부른답니다. 자신이 이 땅의 유일한 통치자임을 나타내는 칭호였는데, 그러나 진나라는 곧 분열의 수순을 밝았지요. 이후 중국은 초나라와 한나라로 나뉘어져, 서로 으르렁댔는데요. 과연 두 나라 중 어디가 승리했을까요? 장기판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답니다. 장기에서 고수가 빨간색 알을 잡지요. 빨간색으로 써진 한자는 '한'인데요, 한나라가 초나라를 무찌르고 승리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한나라는 초나라를 제압하고 400여 년간 찬란하게 꽃을 피웠습니다. 중국의 문자를 한자, 중국 민족을 한족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볼 수 있습니다. 한나라야말로 중국의 위대한 전성기였던 거지요. 하지만 위대한 한나라도 홍망성쇠라는 역사의 공식을 피해갈 순 없었나 봅니다. 혼란기가 찾아왔으니까요. 모든 삼국지 소설에 등장상하는 이 첫 문장을 저 역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이유랍니다.
"천하의 대세는 나누어져 오래 지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지 오래면 반드시 나누어진다. 세상에는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왕권 말기인 한나라 영제 시절, 한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지도자의 힘이 약해지고 기득권 세력이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모습은 망국의 공통적인 모습인데요. 한나라도 역시 이런 상황을 답습해 갔답니다. 이때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는 세력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누구였냐? 바로 환관이랍니다.
대놓고 환관들은 '관직 장사'를 했고, 심지어 외상으로 관직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관리가 된 사람들은 그 돈을 훨씬 웃돌 만큼 백성들을 수탈했어요. 그러니 민초들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죠. 결국 민초들이 봉기하는데, 이것이 바로 삼국지의 모든 발판을 마련했다고 볼 수도 있는, 황건적의 난이랍니다.
그들은 미리에 누런색 띠를 두르고 누런 깃발을 들었습니다. 황건적의 숫자는 무려 30~40만이나 되었으니, 가히 수도인 낙양을 위협할 만했지요. 참고로 낙양은 현재 중국 하남성 서부의 도시로, 뤄양이라고도 불린답니다. 황건적이 진격하며 곳곳에서 난을 일으키니, 이것이 그 유명한 황건적의 난입니다.
본래 십상시(十常侍)는 한나라 말의 환관들 중 핵심이 되는 열 명의 인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부패를 일삼으며,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든 시절이 바로 한나라 말기 영제 때입니다.
< 2 >
원래 원조 삼국지는 진수라는 역사학자가 쓴 역사서랍니다. 진수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위, 촉, 오 삼국이 팽팽하게 대치하던 바로 그때, AD. 233년 촉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진수는 조국인 촉나라가 위나라에 정복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이후, 진나라가 세워지고 관리들이 진수의 학문이 깊음을 알고 천거하여 진수는 벼슬을 얻었지요. 역사서인 삼국지는 진수가 진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280-289년 사이에 편찬되었습니다.
여기에 민담이 덧대어지고 지루한 내용은 빠지면서 입에서 입으로 몇 백년 동안 전해졌지요. 중국인들의 상상력과 염원도 더해졌고요. 그렇게 1,000여 년이 훨씬 지나 명나라가 건국되는데요. 이 시절 나관중이란 소설가가 역사서와 구전을 잘 버무려 삼국지 시대를 엮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1494년에 간행된 「삼국지통속연의」, 줄여서 삼국지연의랍니다.
진수의 역사서부터 시작해서 명나라의 소설까지 얼마나 깊은 중국의 대서사가 담겨져 있는지 느껴지시나요? 이 삼국지연의는 당시 사람들이 밤을 새며 읽을 만큼 홍미진진한 책이었답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 적 일인가요? 우리로 따지면 조선 시대에 연산군이 막 즉위하던 시절에 중국에서 간행된 책인데, 오늘날 독자들에겐 너무 고릿적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여러 버전의 삼국지가 탄생한 거예요. 큰 줄기는 같지만, 작가들마다 각기 다른 상상력과 견해가 더해진 거지요.
그렇다면 저 설민석은 어떻게 썼을까요? 저 역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썼답니다. 과거 중국인들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홍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공감을 자아내는 인물상은 삼국지연의가 아니면 만나보기 힘들거든요 이 뒤부터 '원전' 이라 칭하는 것은 삼국지연의를 말합니다.
Q. 정사 삼국지랑 소설 삼국지의 주인공이 다르다던데요. 「설민석의 삼국지」에서 주인공은 누구예요?
주인공은 당대의 역사관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바뀐답니다. 먼저 정사 삼국지를 살펴볼게요. 위, 촉, 오세 나라 중, 위나라는 조조가 세웠어요. 위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가 바로 서진이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역사학자 진수는 이 진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삼국지를 집필했답니다. 그러니 당연히 누구에게 황제의 정통성을 부여했을까요? 조조겠지요!
그렇다면 명나라 사람이었던 나관중이라는 소설가는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요? 바로 유비입니다. 그 이유는 명나라가 유학의 최고점인 성리학을 주교로 삼을 만큼 명분과 의리를 중시했기 때문이랍니다. 삼국지에서 의리하면 떠오르는 삼인방이 있어요. 도원결의의 주인공, 유비, 관우, 장비요 왜 이들이 의리와 명분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는 책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반면, 유비를 대적했던 조조는 간사한 꾀와 권모술수에 능한 최대의 간웅으로 추락했죠.
유비는 덕망이 두텁고, 조조는 피와 지략은 물론 달변에 능하지요 각자의 기질과 상황, 입장이 어우러져 그들만의 리더십이 탄생한 것이랍니다. 저 역시 유비 삼영제와 제장공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나관중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말한 수는 없답니다. 하지만 조조는 인재를 얻기 위해 자존심과 허세 따위는 과감히 버린 인물이고, 손권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용의 미덕을 갖춘 리더였다는 점도 확실히 짚었어요.
'설민석의 삼국지1' 중에서
유비는 221년 황제에 오르고, 이 나라가 한을 계승한다고 선포했다. 제갈공명은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Q. 한나라요? 유비의 나라는 항상 촉이라고 불리던데. 삼국은 위, 촉, 오 아닌가요?
A. 조조 가문이 이끌던 나라는 위, 손권 가문이 통치하던 나라는 오였던 것이 맞아요. 그런데 사실 유비가 세운 나라는 '한나라'였답니다. 그런데 보세요, 삼국지 초반에 망해 가던 나라도 한나라였잖아요. 그 한나라도 사실은 ‘후한’으로, 앞서 유방이 세운 '전한'과는 다른 한나라입니다. 그런데 유비까지 한나라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한나라'라는 나라를 세우니 중국 역사에 한나라가 너무 많아서 헷갈릴 정도지요.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구분을 위해서 유비의 한나라를 '대촉' '촉한' '촉' 등으로 불렀답니다. 마치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들을 '후고구려' '고려'등으로 구분해서 부른 것과 비슷하죠?
이렇게 조조의 아들인 조비, 그리고 유비 순서대로 황제에 올랐고요. 오나라의 손권은 한참 후에야 추대 형식으로 황제에 등극했어요. 위나라의 조비와 촉나라의 유비는 서로가 자신이 정당한 천하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며 황제 역할을 해 나갑니다. 결론적으로 이제 드디어 위, 촉, 오 삼국의 시대가 펼쳐지게 됐네요.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두 명이나 세상을 떠나고서야 말이죠.
Q. 제갈공명이 2,3,4,5차례 북벌에서 모두 패한 건가요? 그렇다면 사마의가 제갈공명보다 더 지략이 뛰어났나요?
A. 물론 사마의의 지략도 보통은 아니었지요. 둘은 100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한 천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마의는 2인자 콤플렉스가 있었고 스스로도 이를 인정했답니다. "공명만은 내가 도저히 꿰뚫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공명은 여태껏 북을 평정하기는커녕, 영토를 조금도 넓히지 못했지요. 왜 그랬을까요?
첫 번째, 제갈공명이 나아가는 지형은 공격에 아주 불리했습니다. 제갈공명의 출발지인 서천은 지형이 험준해서 지키기에 좋았지만, 반대로 밖으로 공격해 나갈 때는 어려움이 많았죠. 제갈공명이 자주 한탄하던 말이 있었어요.
“형주가 우리 것이었다면, 낙양을 바로 칠 수 있는데, 형주를 잃어서 우리가 이렇게 힘들어졌구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형주와 허창, 낙양은 가까운 데에 있었지요. 그 사이에 있는 중원은 평야 지대라 말을 달려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형세였고요. 하지만 일찍이 동오에게 형주를 빼앗겨, 제갈공명은 어쩔 수 없이 대군을 이끌고 서천을 출발하여 한중을 지나 장안까지 가야했습니다. 그 길에는 상당히 험준한 산맥들이 있어 이동이 쉽지 않았지요. 그러니 지원과 보급도 쉽지 않고, 이동하는 중에만 상당한 체력을 낭비해야만 했죠. 결국 지형적으로 상당히 불리했던 겁니다.
두 번째, 적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마속처럼 제갈공명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믿다가 크게 패한 장수들이 있었고요. 제갈공명이 황제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는 유언비어에 촉 황제 유선이 제갈공명을 불러들이기도 했지요. 이때 제갈공명은 승리를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황제의 명령을 저버릴 수 없다며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어요. 그리고 한 번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동오가 쳐들어온다는 거짓보고를 제갈공명에게 올린 장수도 있었으니, 제갈공명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 이유는 제갈공명을 대하는 사마의의 태도에 있습니다. 사마의는 제갈공명의 능력이 자신보다 뛰어남을 인정하여 언제나 조심 또 조심했습니다. 출정한 위군이 패배해서 돌아와 스스로의 죄를 물어달라고 하자 사마의는 이렇게 말했죠. “어찌 그대의 잘못이겠는가? 나의 지모가 제갈공명의 지혜보다 부족하기 때문이다.”
제갈공명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방어만 하니 장수들에게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길 자신이 없다면, 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라는 것을 사마의는 알고 있었죠.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알면 100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지요. 사마의는 자신과 상대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자신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인정했기에 오히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최후 승리는 지략이 뛰어나거나 싸움을 잘한다고 하여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여 알고, 장점은 극대화시키고 단점은 인정하고 극복해 나가는 것. 그것이 1700년 전 사마의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모든 위기에서 진정한 승리를 가져다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입니다.
삼국 이후
죽은 다음까지 신들린 계책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한 제갈공명의 대활약이 드디어 끝났습니다.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건 사마의였네요. 제갈공명이 죽고 난 후는 사마의의 세상이었습니다. 조조를 이은 조비가 죽고 어린 조예가 올랐었지요? 그러나 조예도 단명했고 이후에는 여덟 살의 조방이 황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마침내 위나라 내부의 경쟁자들도 모두 살해한 사마의가 실권을 잡게 되었지요.
사마의는 황제 위에 있는 실권자로 권력을 누리다가 72세에 눈을 감게 됩니다. 사마의가 죽고 그의 아 들 사마소가 그 권력을 물려받았으며, 12년후, 사마소의 공격에 촉나라가 망하고 유선이 항복했지요. 유선은 유약하고, 야심도 없어서 사마소의 위나라 군대가 서천 앞까지 들어오자 큰 고민 없이 항복했어요.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낙양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습니다. 무를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고 부단히 외치던 아버지 유비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지요.
다시 2년이 지나, 사마의의 손자이자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이 실권을 물려받게 되었어요. 사마염은 당시 위 황제였던 조조의 손자 조환으로부터 제위를 빼앗아 새로운 황제가 되었죠. 그리고 위라는 국호를 진으로 바꿉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요. 한나라 황실을 모시던 조조의 가문이 황위를 찬탈했으며, 조조를 모시던 사마의 가문이 조씨 가문을 내쫓고 황제에 등극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이 승승장구하여 손권 사망 후 내분을 거듭하던 오나라까지 통합했으니, 그것이 280년, 드디어 천하가 다시 서진이란 나라로 통일된 순간이었습니다. 한나라 이전 과거 진시황제의 진나라와 이름이 같아서 사마염의 진나라를 서진이라 부른답니다.
이로써 황건적의 난 이래에 100여 년간 위, 촉, 오 삼국 중 어떤 나라도 이루지 못하던 천하 통일이란 대업을 사마 씨 가문이 해냈습니다. 그 많은 영웅호걸들이 해내지 못한 대업을 막판에 등장한 사마의가 이룬 것이 허무하다고요?
아니 어쩌면 너무 많은 영웅들이 동시대에 존재했기에 그들 중 아무도 대업을 이루지 못했던 것 일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특출나면 때로는 모두가 평범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설민석의 삼국지2 중에서
< 참고자료 > : 중국 고대사 메모
하 : 기원전 21세기, 첫 임금은 우, 마지막 임금 걸(기원전 17세기) 〉 전설 속의 제왕
은 : 기원전 17세기
주 : 기원전 12세기
춘추시대 시작 : 기원전 770
전국시대 : 기원전 5세기
합종 : 전국시대 1강 잔의 독주체제를 견제하기 위해 세로(남북)로 늘어선 6나라가 합쳐 동맹정책을 폈다.
연횡 : 서벙의 진나라가 동방의 6국과 각각 동맹을 맺어 6국의 합종을 끊는다는 전략이다.
진의 통일 :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본래 서쪽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부족이었으나 기름진 평원을 얻기 위해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다.
기원 전 8세기 주 왕실이 이적의 침입을 받아 수도를 동쪽 낙양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 양공이 천자를 수행한 공로를 이정 받아 제후국이 되었다.
그 이후 주 왈실의 힘이 약해지는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로 접어 들면서 진은 ‘전국 7웅’의 하나가 되어 세력을 탄탄히 굳혀나가게 된다. 특히 기원 전 4세기 효공이 개혁정치를 폈고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루었으나 진은 통일한지 14년 만에 붕괴되었다.
진이 멸망한지 4년 뒤 한(유방)이 통일, 그후 한은 동한을 합쳐 400년 넘게 지속되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한 때는 진나라가 망하고 100여년이 지난 뒤이고 한의 건국 후 70년쯤, 한 무제 때이다.
후한(後漢)과 십상시(十常侍)
기원후 8년, 한나라는 황제의 외척이었던 왕망의 쿠테타로 인해 멸망해버립니다. 왕망은 자기가 황제라는 드립을 치더니 신(新)나라를 새웁니다. 하지만 잔존 한나라 세력이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나라의 황족이자 지방 호족이었던 유수(劉秀)라는 자가 세력을 모아 신(新)나라를 박살내고 다시 한나라를 건국해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왕망한테 망하기 전의 한나라와 새로 건국된 한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전자를 전한, 후자를 후한이라고 하거나, 수도의 위치를 기준으로 각각 서한, 동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 : 전한=서한(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
유수가 세운 한나라 : 후한=동한(25년 ~ 220년)
그런데 후한이라는 새로운 한나라에서도 황제를 뒤흔드는 세력이 여전히 기승을 부렸습니다. 유수가 나라를 세울 때 다른 지방호족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지방호족들의 눈치를 보며 국가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 때문에 조정은 지주들의 토지 소유 제한까지 풀게 되었고, 덕분에 지방호족들은 막대한 토지를 사들이며 각 지역에서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됩니다.
반대로 후한의 황실은 힘을 얻지 못할 상황만 이어졌죠.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 년의 시간 동안 후한에는 총 14명의 황제가 즉위했었습니다. 이 중에서 첫 두 황제를 제외하면 모두 20세 이전에 황제가 되었죠. 후한은 어린 황제를 두고 외척과 환관들이 좌지우지하던 나라였습니다. 외척들이 자기들 멋대로 황제를 갈아치우고, 심지어 독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죠. 그렇게 14명의 황제 중 5명의 황제는 황제 자리에 2년도 채 앉아 있질 못하고 요절하거나, 암살당하거나 폐위되었습니다.
영제靈帝(재위: 168년~189년)의 통치기가 되면 10여 명의 환관들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국가 전체를 쥐락펴락하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삼국지》 초반에 등장하는 십상시(十常侍) 입니다. 환관들은 자기들이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지방호족들의 자식들이 중앙정치에 들어오는 것까지 막아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관직을 돈 받고 팔아대며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인간들을 중앙정부 관료로 앉혔죠. 물론 지방호족들도 가만히 있진 않았습니다. 중앙정부로 출세하는 길이 막힌 만큼 지방에 머무르며 계속 땅을 구매해서 자신들의 배를 불려나갔죠.
후한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생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환관들에게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산 관리들은 뇌물 값을 회수해야 하니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먹었고, 대지주들도 농민들로부터 막대한 소작료를 받아먹고 있었죠. 그나마 이렇게 착취라도 당하면 다행일 지경이었습니다. 이제는 아예 농사지을 땅조차 없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말이죠. 결국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농민들은 도적떼가 되어갔습니다. 184년, 그 유명한 황건적의 난이 발발합니다.
후한의 중앙정부에서는 외척과 환관의 권력쟁탈전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황실의 외척이었던 하진 (?~189년)은 동탁(139년~192년)을 포함한 여러 지방 군벌들을 일부러 수도 낙양으로 불러들입니다.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수상한 낌새를 느낀 십상시가 오히려 하진을 먼저 제거해버렸고, 하진의 부하들은 황제의 명도 없이 환관들을 몰살시키며 난장판이 벌어지죠. 외척도 환관도 몰락한 바로 이 순간에 동탁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도착하여 정권을 어부지리로 장악해버리게 됩니다. 동탁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릅니다. 자기 멋대로 황제를 바꾸는가 하면, 화폐를 마구 찍어내 초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내기도 했죠. 황건적의 난을 거치며 군대를 보유하게 된 지방호족들은 힘을 모아 “역적 동탁을 처단하자!"라며 낙양으로 쳐들어갔지만, 동탁은 낙양을 불태워버리고 수도를 장안(오늘날 시안)으로 옮겨버립니다. 물론 동탁은 머지않아 부하에게 암살당하긴 합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무렵부터 지방호족들이 이 혼란을 틈타 여러 이민족이 중국대륙으로 유입됩니다. 지방호족들은 이민족과 싸우기도 했지만 이민족 부대를 용병으로 고용해 호족들끼리의 경쟁에 써먹기도 했습니다. 이 이민족들은 삼국시대가 끝난 후에 중국대륙에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되죠. 일단은 갑작스럽게 많은 이민족들이 한족과 섞여 살기 시작했다는 점만 기억하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위, 촉, 오 삼국시대
아무튼 지방호족들의 세력다툼이 어느 정도 교통정리가 되어 최종적으로 세 국가가 남습니다. 각각 조조(155년~220년)의 위나라(220년~266년), 유비(161년~223년)의 촉나라 (221년~263년), 손권(182년~263년)의 오나라(229~280년)죠. 이들은 명목상 한나라의 제후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한나라 황제를 명분 삼아 중국대륙을 나눠 먹고 있을 뿐이었죠. 이 시대를 다룬 사서와 소설의 제목이 '삼국지'인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세 국가 중 위나라가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위나라의 조조는 동탁의 부하들로부터 도망친 한나라 황제를 보호하며 한나라 전체를 장악하려 했죠. 그런데 조조는 사실상 한나라 조정을 다 휘어잡은 후에도 한나라를 없애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나라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져갔을 뿐, 죽을 때까지 황제 자리에 오르진 않습니다. 대신 그의 아들 조비(재위: 220년~226년)가 한나라 황제를 내쫓고 위나라 황제가 되어버리죠. 위나라가 황제 자리를 찬탈하자 촉나라와 오나라의 군주들 역시 너도나도 황제를 자칭합니다.
그러나 위, 촉, 오 모두 대륙 통일의 과업을 이루지는 못 합니다. 유비, 조조, 손권과는 전혀 다른 가문이 통일을 했죠. 바로 사마 가문입니다. 시작은 사마의(179년~251년)였습니다. 사마의는 조조에게 등용된 후 조조의 아들(조비), 조조의 손자(조예), 조조의 증손자(조방)까지 주군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다 쿠데타를 일으켜 위나라 정권을 장악했죠. 이후 사마의의 아들(사마소)이촉나라를 정복했고(263년), 사마의의 손자(사마염)는 위나라 황제를 내쫓고 대신 자신이 황제가 되어 국호를 진나라 (265년~316년)로 바꿔버리죠. 그리고 280 년에 진나라가 오나라까지 멸망시키면서 삼국을 통일합니다.
효기심 / ‘권력으로 읽는 세계사 한중일편’중에서
* 위글 제목 ‘후한(後漢)과 십상시(十常侍)’, ‘위, 촉, 오 삼국시대’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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