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 메모

송담(松潭) 2009. 1. 19. 23:31

 

세계사 메모

 

 

4대 문명이란 서쪽부터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을 말하는데,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합하여 ‘오리엔트 문명’이라 부른다.

 

1901년에 프랑스의 탐험가가 이란의 고도(古都) 수사에서 높이 2.25m의 검은 현무암의 둥근 기둥에 쐐기문자로 새겨진 잔문과 282조의 조문으로 된 함무라비 법전을 발굴했다. 기원전 18세기 고바빌로니아 왕국 제6대 함무라비왕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전체가 통일되었는데 함무라비 법전의 특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同態復讐)의 원칙과 귀족, 평민, 노예 사이에 엄격한 신분차를 인정한 형벌이다.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2,000년대 초 이후 중앙아시아의 인도, 유럽 계 유목민족들의 빈번한 침범으로 위협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소아시아에 강력한 왕국을 수립한 히타이트인은 세계 최초로 철기를 본격적으로 이용했으며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하여 기원전 1,530년경에 고바발로니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서는 기원전 4,000년기에 관개 농경을 시작했다.

 

 

메네스왕의 통일과 피라미드

상이집트(나일강 중류지역)와 하이집트(나일강 하류지역)는 기원전 3,000년경 메네스왕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집트를 통일한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후에 태양이 되는 왕의 관을 모시는 피라미드가 있었다. 피라미드의 네 변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는데, 왕의 사체를 넣은 묘실의 입구는 반드시 북쪽에 있고 통로는 거의 북극성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피라미드의 수는 약 80개에 이르며 제일 큰 것은 약 4,400년 전에 만들어진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밑변 277m, 높이 약 144m의 사각추로 평균 2.5t의 자른 돌 230만개가 겹쳐 쌓여 있다. 본체 부분 완성에만 10만 명이 동원되어 2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외부를 장식하는 돌과 돌 사이의 빈 틈은 폭이 0.5mm밖에 안될 정도로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졌다. 덧붙여 피라미드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의 피라미스(세모꼴의 빵)에서 유래한다.

 

 

유대교의 탄생

셈계의 헤브라이인은 기원전 2,000년경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정착했으며 일부는 이집트로 이주하여 노예가 되었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할 때 헤브라이인들은 ‘십계’를 지킬 것을 조건으로 탈출을 도와 준 야훼(여호와)를 민족신으로 신앙하게 되었다. 그들은 선주민 팔레스타인과 다투면서 기원전 11세기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왕국을 건설했다. (팔레스타인은 원래 ‘필리스티아인의 토지’라는 의미다.) 이 왕국의 최고의 전성기는 널리 통상을 했던 솔로몬왕 시대였는데 점차 주변의 강국들이 압력을 가해와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신바빌로니아(기원전625~538)에 의해 멸망했다. 그때 많은 헤브라이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기원전 538년까지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바빌론 유수)

 

그들은 높이 43m 7층짜리 바벨탑 건설에 동원되었다. 고난의 생활이 계속된 가운데 헤브라이인들 사이에 신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카리스마)들이 나타나 메시아(구세주)에 의한 구원이 있을 거라고 예언했다. 그 결과 신앙이 한층 깊어지고 야훼를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유일한 신으로 믿는 유대교가 형태를 갖추었다.

 

유대교는 유일신을 신앙하는 보기드믄 종교이며, 이 세상의 종말에 ‘메시아’가 나타나 헤브라이인만이 신에 의해 선택받은 민족으로 구제받을 것<선민(選民)사상>을 믿는 종교이다. 유대교의 경전은 <구약성경>이다.

 

유대교에서는 메시아라 칭하는 예언자가 차례차례 나타났는데 그들 중에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예수와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무하마드)도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칭했다. 크리스트는 메시아를 의미하는 ‘크리스토스’에서 온 말이다. 헤브라이란 ‘강(유프라테스강)의 저쪽에서 온 자’란 의미로 이민족이 붙인 이름이다. 그들 스스로는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있었다.

 

 

폴리스

그리스인들은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연안의 분지와 협소한 평야에서 오리브 재배를 확대하여 기원전 약 8세기경부터 인구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소규모 도시(폴리스)를 구축했다.

1,000여 개 이상의 폴리스가 건설되었다. 폴리스의 이상적인 시민의 수를 플라톤이 5,040명이라 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 한 곳에 모아서 웅변가의 소리가 닿는’범위인 2,000명이라고 한 것처럼 폴리스의 규모는 작았다. 폴리스는 교역의 중심이자 농민들의 공동 방위의 거점이다. 폴리스의 중심은 아크로폴리스(성채)아고라(광장)이다.

폴리스의 세계에서는 기원전 776년 이후 4년마다 여름에 제우스를 모시는 성지 올림피아에서 5일 동안 경기를 열었다. 이것이 올림픽의 전신이다.

 

 

마라톤의 전설에서 나온 마라톤 경기

 

페르시아 제국은 아테네 등의 폴리스에 3번에 걸쳐 발칸 반도로 원정군을 파견했다.(페르시아 전쟁) 제1차 원정(기원전 492년)은 함대의 난파로 실패했으며 제 2차 원정(기원전 490년)군은 아테네 북동 30여Km에 있는 마라톤에 상륙했다. 아테네 보병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해 폴리스세계를 지켯다. 그후 페르시아군이 아테네 진격의 움직임이 보였으나 보병군은 서둘러 아테네로 돌아와 위기를 넘겼다. 이것이 점차 한 사람의 전령이 전했다는 얘기로 퍼져나가 현재의 마라톤 경기가 것은 유명한 얘기다.

 

페르시아가 다시 침공해 올 것에 대비하여 200여 폴리스가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을 조직했다.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 제국으로 변질하여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기원전 443~429)의 번영을 구가하였다. 페리클레스는 대리석으로 만든 파르테논신전, 대극장, 성벽을 건설하였고 빈부의 차별 없이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은 폴리스의 자립을 원칙으로 하는 폴리스 세계의 전통을 깨트렸다. 아테네의 강성화를 겁낸 다른 폴리스는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아테네에 대항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했다. 이윽고 두 세력 사이에 30년 가까이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이 일어났다.

 

그리스 세계는 만성적인 전쟁이 계속되면서 농업은 황폐하고 폴리스내의 빈부격차가 확대되었다. 게다가 선동 정치가(데마고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폴리스를 이용하는 중우정치를 한 결과 그리스 세계는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그리스 세계를 통합한 것이 북방의 신흥세력인 마케도니아였다. 마케도니아는 그릿 연합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확립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가 원정 도중 몰락한 그리스인을 정착시키기 위해 건설한 70여 도시 알렉산드리아(현재 25곳 확인)중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라였다.

이 시대에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궁핍하고 혼란한 그리스에서 동방 각지로 이주해 아테네의 그리스어를 토대로 페르시아어 등 여러 언어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코이네’가 공통어가 되었다. 이러한 융합적인 문화를 ‘헬레니즘(그리스 풍의)문화’라고 하며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쓰러뜨린 기원전 330년부터 이집트 왕국이 로마에 의해 무너지는 기원전 30년 간을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무렵 동지중해는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 3국의 계속되는 다툼으로 세력이 약화된 상태였으며 서지중해에서는 제해권을 둘러싸고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들과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페니키아인이 다투고 있었다.

신흥세력인 로마는 그리스인과 합세하여 카르타고와의 전쟁(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146)에서 승리해 바다의 세계로 진출, 마침내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다. 그후 로마는 동지중해로도 세력을 확장하여 기원 146년에 마케도니아를, 기원전 64년에 시리아를, 그리고 기원전 30년에는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했다.

   

미야자키 마사카츠, 이영주옮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중에서

 

 

중국 역대 왕조 : 통합과 분열

출전 : 효기심 / 권력으로 읽는 세계사 한중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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