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을 생각해 본다

송담(松潭) 2019. 8. 31. 10:28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을 생각해 본다

 

 

 

 

 

 

 

 

 아침의 음악, 애절한 소프라노에 이어지는 잔잔한 테너의 울림이 들린다. 이렇게 음악을 들으면 어느 작가의 수필집 아침의 피아노가 떠오른다. 지금은 생을 마친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 그는 왜 아침의 피아노라 했을까. 그는 베란다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고 했고 기어코 이겨내어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책을 읽은 후부터는 아침에 듣는 피아노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의 피아노 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가을의 문턱에서 결실과 풍요를 떠올리지 않고 왜 우울한 생각이 드는 걸까. 나이가 들어서인가.

 

 모멘토 모리(Momento Mori)! 언젠가는 죽는 존재임을 잊지 마라. 죽음을 생각하고 살면 현재를 보다 알차게 살 수 있다고 했지만 자신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것은 어쩐지 을씨년스럽다지금 자신의 육체가 온전한 사람을 향한 모멘토 모리는 아픈 사람의 입장에서는 허구이다. 또한 위로는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라는 말도 아픈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용하다. 아픈 당자가가 아니면 그 누구의 위로도 위로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몸이 아픈 사람은 진정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사람이다.

 

 물론 그 누구도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다만 자신이 살아온 시간성(時間性)’이 생의 의미를 부여한다. ‘시간성이란 시간 위를 걷고 있는 인간의 모습, 빛깔이다. 지지부진한 삶으로 일관된 사람의 시간성과 투혼하는, 성찰하는 사람의 시간성이 같을 수 없다. 산다는 것은 시간의 한계에 다다르기 전까지 자신이 비쳐주는 시간성의 빛깔이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성에 나름 만족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자족(自足)하기에 충분하다.

 

 그동안 막연하게 알고 있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도 가을의 초입에 떠오른 화두다. ()은 물질적 요소를 총칭하고, 색깔 있는 것은 곧 빛을 반사하는 물체이므로 색()이 곧 물질matter을 대변한 것이라고 하며, 우리의 육체도 색()이라고 한다. 색즉시공의 우주론적 의미나 철학적 의미를 선명하게 알 수는 없으나 모든 것이 공()이라는 것은 인연이 사라지면 존재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공()입니다.라는 도올 김용옥선생의 말씀이 쉽게 이해되었다. 세상 모든 것이 공()인데 인간의 육체 역시 공(),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끝난다.

 

 지금 아픈 자도 아프지 않는 자도 생은 공()이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한 여름 뭉게구름처럼 파란 하늘에 떴다가 다시금 사라지는 것. 그 누구도 예외 없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나 사는 동안은 자신의 시간성을 아름다움으로 채색하는 일이다. 이것으로나마 공()의 삶을 의미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의 전령사는 바람이다. 엊그제까지 무더위로 끈적했던 피부에 바람이 스치니 가을이 오고 있음을 감지한다. 곧 조석으로 냉기가 느껴질 이 가을에 지금 육체적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머지않아 나도 맞이하게 될 그분들의 심정을 헤아리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 본다.

 

 (2019.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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