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들
얼마 전 동창의 빙모상에 가서 그간 소원했던 친구와 수다를 떨고 서로의 삶도 격려했다. 또 며칠 전 동료 선생님의 모친상에 가서는 비록 짧았지만 학교에서 나누지 못한 대화를 가졌다. 장례식장에 온 친칙 할머니를 느린 걸음으로 부축하며 오래 배웅하는 선생님의 뒷모습도 애틋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재룡 옮김, 민음사, 2009)에서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고 했는데 바람직한 장례가 그런 것이지 싶다. 망자가 떠난 슬픔의 자리에 산 자들이 모여 행복한 유대를 나누는 장례 말이다.
너무 일찍 삶을 등진 사람의 장례, 죽지 않는 것이 마땅한데 죽은 이의 장례는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때에도 산자들은 최선을 다해 떠난 이의 텅 빈 공간을 행복으로 채우려 한다.
추억과 위로, 한탄과 토로가 오간다. 어쩌랴. 산 자는 살아야 하지 않는가. 이때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다. 망자가 남긴 빈 터에서 다시 새롭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노력 때문에 죽음에 대한 존중과 삶에 대한 존중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죽음이 소멸의 무덤이 아니라 생성의 터전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중에서
* 위글 제목 ‘슬픔의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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