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늙기와 죽기, 다가오는구나

송담(松潭) 2019. 5. 26. 19:30

 

늙기와 죽기, 다가오는구나

 

 

 

 

 

 

 나이가 드니까 문상 갈 일이 잦다. 20년 전쯤에는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의 빈소에 문상했는데 10년 전쯤에는 형뻘, 이제는 70살 넘은 내 또래 친구들, 동기생들이 죽어서 부고가 온다.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다가오는데, 태어난 순서대로 가는 게 아니고 나중에 난사람이 먼저 가는 수가 흔히 있어서 가는 데는 차례가 없다. 어쨌거나 다가온다.

 

 친구 부모의 빈소에 갈 때보다 친구의 빈소에 갈 때가 더 힘들다. 죽음은 더 절실하고 절박하게 다가와 있다. 친구의 빈소에 가면 친구의 아들이 상주가 되어서 절을 하고 문상객을 맞는데, 이 아들에게 해줄 위로의 말을 찾기가 어렵다. 나는 상주와 맞절을 마치고 나서

 -자네가 큰아들이지?

 -.

 -자네 몇 살인가?

 -서른여섯입니다

 -자넨 그래도 복이 많은 거야 난 스물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어.

 -, 알겠습니다.

 -자네만 당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리 알게나 누구나 다 부모를 먼저……

 -, 고맙습니다.

 

 이런 하나마나한 소리로 대충 얼버무리고, 어깨도 두들겨주고 나서 식당으로 가서 다른 문상객들과 마주앉는다. 동기생들이 10여 명 둘러앉아서 육개장으로 저녁을 먹고 나서 소주를 마신다. 안주는 돼지머리, 도토리묵, 홍어(사실은 가오리), 멸치조림인데 장례 식장마다 똑같다. 동기생들은 고인의 마지막날들에 고통은 없었는지, 장지가 어딘지, 고인의 자식들이 취직은 했는지, 결혼했는지, 막내가 몇 살인지... 같은 뻔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다. 상주가 가끔씩 와서 부족한 것이 없는지를 살피는데, 그럴 때는 동기생 중 누군가가

 -이바 상주, 빈소 지켜 여긴 신경쓰지 마. 내가 가져다 먹을게.

라고 말해서 돌려보낸다. 이런 것도 장례식 장마다 다 똑같다. 상주를 그렇게 보내놓고 나서 동기생들은 세상잡사를 이야기하거나 고스톱을 친다.

 55년 전에 고등학교 다닐 때, 방과후에 교실에서 치고 받고 싸웠던 두 동기생이 빈소에서 만나서 싸움을 다시 시작한 적도 있다.

 -, 니가 먼저 안 찼으면 쌈이 안 났을 거 아니냐?

 이런 한심한 싸움을 55년 후에 다시 리바이벌했다. 두 동기생이 삿대질을 하면서 악을 쓰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킬킬 웃었다 두 동기생은 화가 나서 식식거리더니 먼저 가버렸다. 두 동기생이 사라지자 다들 또 한바탕 킬킬 웃었다.

 -아이고, 병신들. 칠십이 넘은 놈들이

 -반세기 만의 재대결이네. 나가서 대가리가 터지도록 싸우라지 아이고, 저런 놈들을 동창이라고..

 -, 그런데, 쟤들이 가니까 심심하다.

 

 밤이 길이 지자 몇 명은 돌아갔고 고스톱 판에서 다 털린 사람들은 술자리로 옮겨온다. 술판이 커지면 말들도 많아지는데

 증권 시세, 부동산 동향, 새로 개장한 골프장, 취직한 자식들의 연봉 비교, 새로 나온 스마트폰의 성능 비교, 안주가 맛있는 이자카야 소개, 임플란트 잘하는 치과, 치매, 당뇨, 고혈압, 뇌졸중, 전립선, 불면증, 변비, 골다공증....

 

을 말하다가 다시 이야기를 바꾸어서 여당을 욕하고 야당을 욕하고 진보를 욕하고 보수를 욕하고 김정은을 욕하고 트럼프를 욕하고 마누라를 흉본다.

 

 새벽에 돌아갈 때는 다들 거나했다. 빈소에 문상객은 없고 상주 혼자서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취한 동기생 한 명이 상주어깨를 두드리면서

 - 야 상주, 끝까지 잘 해. 장례에는 정성이 중요해, 오직 정성이다! 알겠나? 정성! 이봐 상주, 졸지 마.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이날 문상의 하이라이트였다. 이로써 조문은 완성되었다. 장례식장에서 문상객들은 낄낄대고 고스톱 치면서 죽음을 뭉갠다. 죽음은 돌출하지 않는다.

 

 여러 빈소에서 여러 죽음을 조문하면서도 나는 죽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다. 죽음은 경험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개입할 수 없고,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해줄 수가 없다. 나는 모든 죽은자들이 남처럼 느껴진다. 오래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염을 받고 관에 드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범 접할 수 없는 타인이라고 느꼈다.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제가 죽었는지를 모르고, 제가 모른다는 것도 모르고 산자는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모른다. 살아서도 모르고 죽어서도 모르니 사람은 대체 무엇을 아는가.

 

 날이 저물고 밤이 오듯이, 구름이 모이고 비가 오듯이, 바람이 불고 잎이 지듯이 죽음은 자연현상이라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그런 보편적 운명의 질서가 개별적 죽음을 위로할 수 없다.

 

 문상 온 친구들이 그렇게 고스톱 치고 휜소리해대는 것도 그 위로할 수 없는 운명을 외면하려는 몸짓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문상의 자리에서 마구 떠들어대던 친구들의 소란을 나는 미워하지 않는다.

 

 김훈 / ‘연필로 쓰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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