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소확행(小確幸)
“욜로YOLO가 가고 소확행小確幸이 왔어요”
*‘You only Live once(한 번뿐인 인생)’의 약자.
젊은 분들에게 요즘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느냐 물으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한 번뿐인 인생, 지금을 즐기자’라는 욜로 트렌드가 과도한 소비로 연결되니 결국에는 생활이 어렵게 되어 이제는 소화행으로 전환되었단다. 소확행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랑겔한스섬의 오후’라는 글에서 처음 등장한다.
하루키는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등으로 소화행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기존에는 행복을 먼 미래에나 도달할 수 있는 큰 목표의 성취 이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소확행은 지금 현재 삶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작고도 확실한 행복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소확행을 추구하는 시대의 도래가 반갑다. 무엇보다도 과거 산업화 시대를 산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던 획일화된 행복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하면서도 개별적인 행복의 기준을 세운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무엇이 행복인지 개인이 정했다기보다는 사회가 이러이러한 것을 욕망하라고 결정하고 주입했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월급 많이 주는 큰 회사에 취직한 후 결혼해서 아이들 가르치며 아파트 평수를 넓혀갈수록 행복이 온다고 말이다. 하지만 소확행은 행복의 기준을 사회가 아닌 개개인이 정하라고 권한다. 그래서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행복들이 무한하게 생겨날 수 있다.
소확행을 찾는 요즘 세대는 그렇게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죽기 살기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어찌 보면 지금 주어진 자기 삶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태도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최근에 읽은 책 《조그맣게 살 거야》에서 “바람의 향기와 공기의 온도, 나뭇잎의 색깔, 시시때때로 미묘하게 변하는 길거리의 풍경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 천천히 걷고 느리게 생각하다 보면, 말수는 줄어들지만 웃을 일은 더 많아진다”라는 문장을 만났다. 행복은 집이나 자동차같이 비싸고 갖기 어려운 대상들을 소유하고 나서 느끼는 감정이 아닌, 지금 현재 시간을 내가 어떻게 온전히 쓰는지, 자연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스스로에게 부여 했는지에 달려 있다.
물론 꿈꾸던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는 것, 결혼을 하고 내 집을 마련하는 것 또한 중요한 행복이다. 살면서 그 목표들을 이루었을 때 오는 성취감과 만족은 매우 클 것이다. 다만 그것 만이 행복이라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이 행복을 위해 달리는 시간, 애쓰는 시간으로 소비되고 만다. 또한 목표가 이루어졌다 해도 또 다른 목표가 기다리고 있기에 항상 부족하고 항상 바쁘다. 설상가상 그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그동안의 노력이 무의미해지고 인생을 낭비한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소확행은 장기간의 노력 끝에 큰 행복을 강하게 한번 느끼는 것이 아닌,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일상적으로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이니, 이 얼마나 좋고 감사한가.
나의 소확행은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렵지 않게 몇 가지가 떠올랐다. 우선 차를 마시며 좋아하는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듣는 시간이 큰 휴식이자 행복이다. 특히 전기현 씨가 진행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나 강민석 씨가 ‘울림’ 라디오 앱을 통해 전하는 ‘소울 케이크’를 즐겨 듣는다. 진행자의 친절한 소개와 함께 좋은 새로운 음악을 만나게 되면 우연히 길에서 보물을 주운 듯 엄청난 마음부자가 된다.
더불어 나만의 케렌시아, 쉼의 공간인 삼청공원을 걸을 때도 참 행복하다. 내 처소와 가까운 이 공원 안에는 다섯 그루 나무 아래에 물소리를 들으며 쉴 수 있는 작은 벤치가 하나 있다. 그곳에 잠시 앉아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새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은 지극한 평화에 가닿는다. 특히 마음이 복잡할 때 자연 풍광을 보면서 걷거나 벤치에 앉아 잠시 명상을 하면 피아노가 조율이 되듯 내 마음이 리셋되는 느낌을 받는다.
서점에서 새로운 책 몇 권을 골라 여유롭게 펼쳐보는 시간도 내겐 큰 행복이다. 책은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게 해준다. 간접경험이지만 견문도 넓어지고 생각도 깊어져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나면 가슴이 설렌다. 또한 한 달에 한 번씩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도 나에게는 중요한 소확행이다. 나를 승려나 책을 내는 작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한 인간으로 봐주는 친구들과의 따뜻한 만남은 삶이 던지는 예기치 못한 커브볼을 맞고도 담담히 버티게 해주는 큰 힘이 된다. 괴테가 그랬던가. 신선한 공기와 빛나는 태양, 맑은 물, 친구들의 사랑만 있다면 삶을 낙담할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괴테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 2 >
(...)
그런데 홀로 남고 보니 그 순간 조금 놀라운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그 친구와 함께 한의원에 가고,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휴대전화를 고치고 그렇게 몇 시간을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내 몸 아픈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아침에 깼을 때만 해도 꼼짝하기도 힘든 컨디션이었는데, 그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올라오니 나도 모르는 힘이 솟아났나 보다. 내 몸이 아프다는 사실의 무게까지도 아침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우리가 살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내 문제점만을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크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프레임 안으로 나를 더 견고하게 가두고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만든다. 이럴 땐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것보다 남에게 아주 작은 친절을 베풀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나의 작은 도움으로 상대가 잘되는 모습을 보면 내 자존감도 올라가고 세상과의 연결감도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많은 사람이 남을 돕는 것은 내 상황이 좋아진 후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작은 도움도 차일피일 미룬다. 내 코가 석 자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 상태가 완전히 좋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영영 누군가를 도울 만한 시절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면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괜찮은 상황이 와도 이것으로는 안 되고 더 괜찮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좀 아프면 아픈 대로 내 사정에 맞게 조금씩이라도 남을 돕는 실천이 결국 우리 스스로를 치유하고 좀 더 완성된 방향으로 이끈다. 내가 그 친구를 도왔다고 생각한 그날은 어쩌면 그 친구가 나를 돕고 치유한 날이었을지 모르겠다.
< 3 >
운동을 해서 몸이 좀 더 유연해지면
에너지도 생기고 삶도 재미있어집니다.
집 안에만 있지 말고 몸을 움직여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을 만나보세요.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단절된 뻣뻣한 몸으로
생각만 바꾼다고 삶이 변화 하지는 않습니다.
여행 중이라 일회용면도기를 열흘 넘게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칼이 낡아 면도할 때마다 약간씩 상처가 났다.
그래서 결정했다. 매끈하게 면도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살살 깎자고. 그랬더니 상처가 나지 않았다!
그렇구나. 뭐든 욕심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살 가면 되는구나.
빨리 가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고 힘든 거구나.
살다 보면 아픔을 겪고 있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세상의 파도에 같이 휩쓸려 울고불고하지 말고
고요한 평정심을 유지하세요.
나의 침착한 눈빛이 상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우리가 무상無常의 진리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내 소중한 것들은 변하지 않고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여겨왔기 때문에 막상 잃어버렸을 때
너무도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형제간에 부모님의 유산을 나눌 때
잘못하면 큰 상처와 오해를 주고받게 됩니다.
유산 때문에 서로 다신 안 보는 사이가 된다면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뭐라고 하실까요?
자기 욕심을 조절할 줄 아는 지혜가 함께하시어
여생을 혼자가 아닌 형제들과 함께하시길.
아무리 재산이 많이도 서로 다투면 부족하다고 느끼고
반대로 떡 한 조각밖에 없어도 서로 나누면 남습니다.
불교 사상 가운데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서운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상대를 미워하지 않는 자비로운 사랑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자비한 마음에는 적이 없습니다.
자기 존중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남을 존중하고 남에게 친절하게 대합니다.
남을 쉽게 무시하고 하찮게 대하는 것은
자라면서 제대로 존중받은 경험이 없거나
본인 스스로가 지금 하찮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그 사람의 모습을 잊지 못하도록 새기는 일.
그래서 다음 생에 또 만나는 인연을 만드는 일.
큰 성공은 그만큼 깊은 고난의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각자가 감내할 수 있을 만큼의 목표를 세우세요.
넘치는 욕심은 설령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본인의 건강도 해치고 가까운 관계도 멀어지게 만들고
자기 시간도 없어져요.
내가 지금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면
인생은 결핍이 되지만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면
인생은 감사함이 됩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가족이라면
친구는 내가 선택한 가족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
옆 테이블에 앉은 아가씨들이 친구가 취직했다니까
"잘 되었당!"을 연신 반복하면서 같이 기뻐하는데 제가 다 기뻐요.
살면서 “너무 잘 되었당! 될 줄 알았어! 너무 기쁘다!"라는 말을
친구들에게 종종 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행복 같아요.
혹시 나와 같이할 친구가 없어 외로운 이유가
한 친구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와 성격도 맞아야 하고, 노는 취향도 같아야 하고,
사는 수준이나 정치 성향도 비슷해야 하고 등등.
나와 맞는 부분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 친구와 만나서 그 부분만을 함께하면 됩니다.
내 모든 면과 맞는 친구만 사귀려고 하면 평생 외로울 수 있어요.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힘든 거 빨리 털어내고 일어나"라고
하는 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본인도 털고 싶은데 못하니까 힘든 거잖아요.
용기를 준다고 한 말이 상대를 힘들게 하는 잔소리가 될 수 있어요.
대신 “많이 힘들구나, 내가 너라도 힘들 것 같아"라고 공감해주세요.
누구를 미워하면 내가 가장 힘들어요.
그 미움을 극복하는 길은 그 대상을 향해
그가 행복해지길, 하고 속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올라오지 않더라도 축복의 말을 그냥 해 보세요.
미움이 그 말이 전해주는 축복 에너지로 점점 녹아요.
그가 행복했다면 나에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내가 자주 우월감을 느낀다면
그건 내 안에 깊은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남을 소중하게 여겨요.
마음속 화를 입으로 표현해버리면 업이 되어 내게 돌아오고
억누르면 병이 되어 내가 아프고
가만히 그 화의 에너지를 지켜보면
자기가 알아서 모양이 변하면서 이내 사라집니다.
승려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산에서 도나 닦지 뭐 하러 속세 일이 끼어드냐며 땡중이라 하고
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면
중생들의 고통이 보이지 않느냐고 이기적인 중이라 한다.
이 사이에서 스님들은 고민한다.
텅 빈 큰 공간에 의자가 하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보통 모양 있는 의자만 의식하고
모양 없는 텅 빈 큰 공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자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텅 빈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마음이라는 텅 빈 공간 안에
한 생각이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생각만 의식하고 생각의 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그 텅 빈 마음 공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본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나쁜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생겼다 사라지는 텅 비고 고요한 마음 공간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현재로 오면 생각이 멈추고 고요해집니다.
그 고요함은 텅 빈 채로 밝으면서도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 깊이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모든 생각들은 이 깊은 마음의 바다로부터
잠시 모양을 밖으로 드러낸 파도와 같을 뿐
이 깊고 충만한 마음바다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생각이나 느낌을 포함한 마음이 있고
생각과 느낌이 사라지고 난 후
텅 비고 고요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 텅 비고 고요한 마음이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수행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과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무르익게 되면
보이지 않는 세상과 보이는 세상이 둘이 아니고
놀랍게도 하나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깨어 있는 고요, 투명한 침묵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들여다보면 끊임없는 생각과 느낌이 자연스럽게 올라온다. 그런데 생각과 느낌은 비교적 쉽게 알아차리지만, 생각이 일어났다가 그다음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있는 고요함은 잘 인지하지 못한다. 즉 생각과 생각 사이느낌과 느낌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고 요한 침묵이 자리하고 있는데, 많은 이들은 그 빈 공간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왜냐하면 생각이나 느낌과는 달리 고요한 침묵은 아무런 모양이 없어서 쉽게 잡히지도 어느 한 곳에 집중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침묵과는 반대로 생각과 느낌은 형태가 있어 남들에게 설명해줄 수도 있고 글로 쓸 수도 있다. 형태가 있다 보니 오랜 습관 때문에 생각과 느낌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해버리는데, 그래서 내 생각, 내 느낌이라고 집착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기 자신을 정의 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고 싶은 질문이 생긴다. 만약 진짜로 생각과 느낌이 ‘나’라고 한다면 그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나'라는 존재가 없었는가? 시간이 지나 그 생각과 느낌이 사라질 때도 그것들이 실제로 ‘나’였다면 나라는 존재의 일부도 생각과 느낌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져야 하는데, 실제로 내가 사라지는가?
우리는 생각과 느낌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있었고 그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도 멀쩡하니 계속 존재한다. 즉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느낌은 ‘나’라는 존재 안에서 구름처럼 잠시 일어났던 것이지 근원적 존재의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이나 느낌보다 훨씬 이전부터 항상 있어온 ‘나’는 무엇일까? 사실 이것을 깨닫기 위해 수많은 수행자들이 생각을 완전히 멈추려고 각종 명상과 화두 참선을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직접 경험을 통해 찾아내야 하지만 혹여 나의 몇 마디가 누군가에겐 경험의 인연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니 부족하지만 나누고 싶다.
긴 설명을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있었고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결같이 있는 것은 바로 고요한 침묵이다. 침묵이 살아서 아는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생각이나 느낌도 고요한 침묵에서 나와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시간이 지나면 침묵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고요한 침묵은 텅 비고 의미 없는 죽은 공간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느낌을 만들어내고, 그들이 존재하도록 그 공간을 제공하고, 사라지려고 하면 품어서 소멸하게 하는 자애롭고도 살아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고요한 침묵의 위치를 살펴보자. 우선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고요한 침묵을 느껴보자. 이 고요함은 몸 안에만 있는가 아니면 몸 밖에도 있는가? 몸 안에 있는 고요함과 몸 밖에 있는 고요함이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구분 없이 하나의 고요함으로 자리하고 있는가? 이번엔 고요한 침묵의 끝을 찾아보자. 끝에 도달할 수 있는가? 침묵 안에 한계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자. 마지막으로 고요한 침묵을 잃어버리거나 완전히 없앨 수 있는지 확인해보자. 아무리 큰 소리가 나도 침묵은 이내 곧 회복되며 상처 입지 않은 본래의 고요한 모습으로 바로 돌아온다.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면서도 깨트릴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고요한 침묵이 끝없는 우주에 가득하다. 부디 고요 속에서 깨어 있는 투명한 침묵과 만나시길 기원한다. 깊은 평온함과 영원한 자유, 생명의 원천과 따뜻한 사랑이 또 그 안에 들어 있다.
혜민 /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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