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루쉰과 깨달음의 길

송담(松潭) 2019. 10. 10. 12:08

 

루쉰과 깨달음의 길

 

 

 

 

 

 

 

인간은 깊은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찰나의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 나간다. 종교차원의 깨달음은 소위 득도(得道)를 의미한다. 예수, 마호메트, 석가 등 이 분들은 평생을 위해서 종교적 차원에서 깨닫고 성인이 된 분들이다. 인생차원의 깨달음은 어떤 자극이나 학습을 통해서 인생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중국의 문학가 루쉰의 깨달음과 인생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루쉰은 중국의 문학가로 중국 근대 문학가의 3걸 중의 한 명으로 문학뿐만 아니라 중국인의 정신적 의사로 13억 중국인으로부터 추앙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여 병든 아버지를 치료하고 아버지처럼 질병으로 고생하는 중국 사람들을 치료해야겠다는 평범한 꿈을 안고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난 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병이 들었는데 돌팔이 의사들한테 치료비만 많이 지불하고 병은 낫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일본에 가서 의학공부를 하다가 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데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19023, 일본으로 가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1904년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의학전문학교 2학년 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세균학 시간에 세균의 형태를 보여주는 영화가 끝나고 종료시간 무렵 시사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의 핵심은 러일전쟁 시 한 중국인이 짜르(러시아 황제의 군대)군대의 스파이로 있다가 일본군대에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는데 빙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때 교실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 중에서 중국인은 루쉰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루쉰을 제외하고는 박수를 치며 환성을 울렸다.

 

 그 영화를 보고 와서 며칠 동안 고민하였다. 어떻게 자기 겨레가 학살당하는 것을 빙 둘러서서 보면서도 무감각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루쉰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중국인에게는 육체를 치료하는 의사보다 정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중국인의 정신을 치료하기 위하여 문학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학 전문학교의 문을 나왔다. 조국 중국인의 정신을 치료하기 위하여 그가 처음으로 쓴 책이 유명한 Q 정전이었다.

 

 루쉰은 중국인을 조소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의사로 생을 마감했을런지 모른다. 루쉰의 고뇌와 애증은 바로 근대 중국의 고뇌와 애증이었으며 루쉰이 남긴 수많은 글들은 당시의 중국을 가장 정직하게 증거하고 있다. 상해의 홍구 공원에는 루쉰의 동상이 서 있다. 그 자리는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 대장에게 폭탄을 던진 바로 그 자리라고 한다. 그 자리에 윤의사의 동상을 세우고 싶었지만 루쉰의 동상이 서는 바람에 윤의사의 동상은 다른 자리에 세우게 되었다.

 

< 2 >

 

 

 인생을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그 일이 본인에게 해가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우리말에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까.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 때 스스로 자원하여 종군하였다. 그때 한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여 함께 미국에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하였다. 전쟁이 끝나가는 무렵 그는 먼저 미국에 돌아왔고 그의 연인 간호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런데 2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헤밍웨이가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그녀는 스페인의 귀족청년과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연인의 배신의 자극으로 인해 나온 작품이 무기여 잘 있거라이다.

 

 천재 작곡가 슈베르트는 너무도 가난하여 어느 목사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목사의 두 딸이 있었는데 그는 둘째딸을 사랑하게 되었다. 목사가 그 사실을 알고 그의 집에서 내보내 버렸지만 그는 목사의 딸을 잊지 못하였다. 목사의 집에서 나온 후 사랑하는 연인을 겨우 한번 만났을 뿐이었지만 슈베르트는 목사의 딸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미완성 교향곡이라는 불후의 명곡을 남기고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풍상은 자연을 아름답게, 시련은 인간을 아름답게"라는 경구를 필자는 기억하고 살고 있다. 시련에 지지 말자. 시련을 극복하고 깨닫고 정진하면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다. 유한의 삶을 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상을 극복하는 것이고, 진정한 삶은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그 해답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김종재 / ‘지식사회의 인간관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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