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레오폴트 모차르트 아들, 아마데우스

송담(松潭) 2018. 4. 14. 19:18

 

레오폴트 모차르트 아들,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의 1756년은 레오폴트에게 있어 의미있는 한 해였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입지보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후일 더욱 유명세를 얻게 되는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책의 탈고(脫稿)가 있기 전 그의 막내아들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탄생은 그에게 있어 명예보다 더한 기쁨을 안겨주었던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이 모차르트를 두고 분더킨트(wunderkind)’, 신동이란 말을 한다, 이에 대한 이의 제기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그 밖에도 천재 모차르트’, ‘오페라와 협주곡의 달인등 갖가지의 수식어들이 그를 따라다니지만 그 중 필자가 좋아하는 수식어는잘츠부르크의 기적이다. 여기에는 여러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우선 레오폴트의 부부는 총 7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모두 사망하고 2명만이 살아남게 된다. 한 명은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또 한 명이 딸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Maria Anna Mozart, 1751-1829)로 가족들이 '난네를(Nannerl)' 모차르트라 불렀던 아마데우스의 친누나다. 물과 오트밀만 먹여 키워야 한다는 레오폴트의 이상한 육아법이 악영향을 끼쳤음에도 이들 남매는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4살이 채 안 된 어린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작곡을 할 수 있다며 잉크를 잔뜩 묻힌 펜으로 종이에 그려대는 귀여운 어린아이의 의기 또한 기적이었을 테다.

 

 아마데우스의 음악교육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홈스쿨링(home schooling)과 다를 바 없었다. 아마데우스는 외부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저 친누나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난네를 모차르트는 당대 최고의 건반악기 주자 중 한 명으로 군림한 빼어난 비르투오소(virtuoso)’였다. 비르투오소(virtuoso)는 이탈리아어 덕이 있는’, ‘고결한의 뜻으로 도덕 과학 문학 등의 분야에서 지식과 조예가 깊은 사람을 지칭한다. 음악에서는 테크닉이 뛰어난 주자를 말한다. 그렇게 아마데우스의 음악환경은 그 누구보다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거다. 누나가 아버지에게 건반 레슨을 받고 있으면 아마데우스도 옆에서 따라 배우며 건반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어쩌다 난네를이 자리를 비울 때면 아마데우스가 금세 자리를 차지해 그대로 모방해 건반을 첬을 정도로 아마데우스의 학습능력은 비범했다. 한 집안에서 신동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 나왔다는 것은 레오폴트의 능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600여곡이 넘는 작품들 가운데 모차르트의 피아노 작품들은 그의 고전성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장르이다. 특히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확연히 구분되는 극단적 강약보다 절제된 강약에 의한 매끄러운 흐름을 지탱하는 것이 관건이다. 또한 기교적인 화려함보다 기교상의 정확성에 더 중점을 두어 음 하나하나의 역할을 충실히 반영해야만 한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모차르트의 음악도 19세기와 가까워지면서 차세대 음악과의 이질감을 피할 수 없었다. 모차르트가 사망하고 몇몇 음악가들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의 그의 음악을 이렇게 비평한 바 있다.

 

 “모차르트의 연주는 실수가 없지만 유행에서는 뒤떨어져 있고, 아마데우스의 작품은 매력적이지만 극적인 요소가 빠져 있다.”

 

 모차르트가 서거한 1791년은 한창 시민혁명이라는 거센 풍파 속에 새로운 시대적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을 때다. 그러자 이제 모차르트의 음악도 한물갔다고 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순수한 목적의 절대음악을 지양하고, 기능적으로 발전된 피아노 기법을 통해 으막의 외적인 요소를 도입한 풍부한 내용과 화려한 연주에 열광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낭만시대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의 단조로운 스타일은 공허한 것이 되었고, 구식으로 치부되었다. 19세기 낭만시대의 기교파 피아니스트인 헝가리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96)와 그의 제자인 폴란드 출신의 카를 타우시크(Carl Tausig 1841-1871)의 등장에 일조했던 인물을 모차르트가 아닌 이탈리아의 무치오 클레멘티(Muzio Clementi,1752-1832)와 독일의 베토벤 으로 여기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 모차르트의 대가적 면모는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건반 연주자로서의 모차르트를 생각할 때 그가 기능과 속도전에 있어서 다른 대가들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보았다면 큰 오산이다. 못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안 했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언제나 치우침 없는 적절한 균형감을 유지하는 것이 악보의 본연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의 건반연주는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지만 막 청소를 끝낸 듯한 산뜻하고 깨끗한 청량함이 음악 전반을 감쌌다.

 

 김태용 / ‘5일 만에 끝내는 클래식 음악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