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된 남성 가수, 카스트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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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이탈리아 피렌체의 오페라는 자칫 기악의 신장으로 인해 흔들릴 뻔한 성악의 체면을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바로크 오페라의 성공여부는 베네치아로 그 중심지가 이동하면서 귀족뿐만 아니라 중산층도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 주효했다. 이 때문에 급속도로 오페라의 대중화가 일며 베네치아에서만 무려 17개의 극장에서 400편 이상의 오페라가 상연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오페라의 파급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던 것은 합창과 기악반주보다 독창 중심의 아리아가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기교적으로 장식된 선율을 소화해낼 수 있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coloratura soprano)’ 및 여성의 음역을 넘나드는 남성 가수인 ‘카스트라토(castrato)’의 눈부신 활약이 있어서다. 때론 감미롭게 때론 화려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다양한 표현을 소화할 수 있는 이들 ‘프리마 돈나(prima donna)’의 아리아는 대중에게 감동과 환희를 줄 수 있 수 있는 최적의 노래였다. 프리마 돈나(prima donna)는 ‘제1의 여인’이란 이탈리아어로 연극이나 오페라에서 주역 여성 가수를 지칭한다. 이탈리아에서 카스트라토가 프리마 돈나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17세기 말미에는 독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점차 극의 내용보다 성악음악을 중요시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베네치아를 시작으로 나폴리로 옮겨가며 아리아에 대한 비중을 높이게 되었다. 이를 위한 고음역 기교파 성악가들의 고용이 늘면서 소프라노 영역의 몸값이 곱절로 상승하게 되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수요가 많아지면 당연히 공급도 많아질 터. 사람들의 요구는 더욱 자극적이고 보다 색다른 음색의 소리를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독교 성경구절의 잘못된 해석으로 여성들이 교회 안팎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제한되었는데, 그런 탓에 여성의 목소리를 대체할 수 있는 카스트라토의 존재가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질 수 있었던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1994년에 개봉된 프랑스 영화 〈파리넬리(Farinelli)>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전설의 카스트라토, 카를로 브로스키(Carlo Maria Michelangelo Nicola Boschi. 1706-1782)의 음악과 사랑을 다룬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만 개봉 후 단 4주 만에 100만 명의 관객을 불러들일 만큼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미국 골든글로브 외국영화상을 수상하는 등의 기염을 토했던 작품이다. 여기서의 '파리넬리'라는 이름은 카를로 브로스키의 예명이다. 이 예명은 카를로 브로스키의 후원자 성을 본떠 불리게 되었다.
흥행 돌풍에 쓰인 소재는 그야말로 파격적이고 자극적이다. 성인영화 등급이라 당시 필자가 어린 나이에 몰래봐야 했을 만큼 자극적이기 이를 데 없는 장면들이 더러 나온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는 것 카스트라토라는 한 위대한 성악가의 이야기를 면밀히 보여준 역사적 고증에 있다.
카스트라토의 어원은 ‘카스트라레(castrare)’로부터 온 것이다. 뜻은 ‘거세하다’이다. 6-8세의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남자아이의 성기를 거세해 목소리를 유지해내는 ‘남성 거세 가수’가 바로 카스트라토이다. 그들은 종교적 이유로 공연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여성 소프라노의 영역을 대신하며 바로크 오페라의 수준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 세대의 상위 3%의 카스트라토는 엄청난 부와 명예가 따를 정도로 절정의 인누릴 수 있었지만 나머지 카스트라토들은 그렇지 못했다. 카스트라토는 나이가 들어가면 서서히 목소리가 망가지고 남자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폐인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설령 카를로 브로스키처럼 성공했다고 해도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카스트라토의 운명이다. 영화 중 한 장면에서 동장하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Rinaldo)>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를 듣고 있자면 그들의 생이 얼마나 안타깝고 처절했는지를 잘 느낄 수 있다.
참고로 이때 파리넬리의 역할을 맡은 이탈리아 배우 스테파노 디오니시(Stefano Dions 1966~ )가 부른 ‘울게 하소서’는 당연히 직접 부른 것이 아닌 립싱크이다. 실존하는 진짜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라 여겨도 될 정도의 정교한 노랫소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몰입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 노래는 놀랍게도 한 사람의 목소리로 녹음된 것이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재현해내고자 최신 음향편집 가술을 총동원해 7개월을 걸쳐 만든 것이다. 거세되지 않고 변성기를 거친 정상적 남성가수를 일컫는 지금의 남성 소프라노 가수인 카운터 테너와 일반적 여성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합성해 처리한 기계음이다.
종종 이 영화를 보고 카스트라토의 목소리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그러한 인식은 현재 버젓이 잘 활동하는 카운터 테너들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그릇된 편견으로 이어진다. 필자 주변에는 몇몇 카운터 테너로 활동하는 성악가들이 있다. 적어도 필자가 아는 그들의 성격은 보통의 테너, 바리톤, 베이스 등 남성성이 잘 드러나는 전형적인 남성파트의 성악가들보다 훨씬 매너 좋고 터프하다. 무대 외의 평소 목소리도 아주 굵다.
김태용 / ‘5일만에 끝내는 클래식 음악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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