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떠나보내며…두 거장,
눈물로 새겼을 음표들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그 사망 원인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비창 교향곡을 초연한 지 불과 9일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된 차이콥스키의 소식을 듣고 라흐마니노프는 얼마나 황망했을까. 공식적 사인은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고 걸린 콜레라였다. 공교롭게도 차이콥스키의 어머니 역시 콜레라로 삶을 마감했다. 어머니에서 아들로 계승된 죽음의 질병을 라흐마니노프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한 귀족의 어린 조카를 상대로 벌이던 동성애가 발각되었고, 이 실상을 낱낱이 밝힌 문서가 공공연히 세상에 유포되었으며, 비밀 법정이 열려 작곡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살을 강권받은 사실을 라흐마니노프는 차마 알지 못했을까.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는 여러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동료 작곡가의 죽음을 슬퍼하며 피아노 트리오를 작곡했다.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란 부제를 달고 있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삼중주 Op. 50는 음악적 동반자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향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두 사람 사이가 늘 막역했던 것은 아니다. 모스크바 음악원을 창립했던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루빈스타인은 애초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헌정자인 동시에 직접 초연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악보를 받아들고 연습을 진행하게 되자 루빈스타인은 격렬한 불평을 서슴지 않는다. 무리하게 확장된 음역으로 손에 무리를 일으켜 지나친 볼륨에 집착하는 데다, 같은 주제를 불필요하게 반복하거나, 양손으로 표현하는 엇박이 전혀 피아니스틱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헌정 자체를 거부한 루빈스타인 대신 한스 폰 뵐로에게 초연을 맡기면서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간 시기도 있었지만, 3년이 지나 루빈스타인이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화해로 더 끈끈하게 봉합된다.
루빈스타인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차이콥스키는 피아노 트리오라는 장르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세 악기의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다면서 여러 의뢰를 거절해 온 참이었다. 그러나 절친했던 동료의 죽음은 그에게 예외적인 창작을 불러일으켰다.
청년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트리오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저음역의 바닥을 두텁게 보강하며 장중하게 일렁이는 슬픔, 고음역의 상향을 통해 폐부를 관통하는 노스탤지어를 자신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이식하고 싶었을 것이다.
1년 뒤 작곡한 피아노 삼중주에 ‘슬픔의 트리오’(Trio Elegiaque)라는 부제를 붙이면서 라흐마니노프는 그 맥락을 이어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추모의 당사자는 차이콥스키였다. 음악적 롤 모델의 돌연한 죽음에 낙담한 라흐마니노프는 슬픔의 트리오를 작곡한 이후 한동안 우울증에 허덕이며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1978년, 소련 문화성은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비소 중독에 따른 자살이라 인정했다. 그러므로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추모하며 작곡됐던 라흐마니노프 ‘슬픔의 트리오 Op. 9’ 맥락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두 거장의 작품은 이처럼 친밀한 인간관계를 토대로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를 관통하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결속되어 있다.
조은아 | 피아니스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8.3.3 경향신문)
'클래식,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세된 남성 가수, 카스트라토 (0) | 2018.04.14 |
---|---|
널뛰듯 펼쳐지는 옥타브의 폭넓은 도약… (0) | 2018.03.24 |
슈만,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 첫사랑 또는 끝사랑 (0) | 2018.03.18 |
말러의 ‘피아노 4중주’ (0) | 2018.01.20 |
오케스트라의 종류 (0) | 2017.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