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진짜 천재는 따로 있다, 베토벤

송담(松潭) 2018. 4. 15. 11:03

 

진짜 천재는 따로 있다, 베토벤

 

 

베토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베토벤이 태어난 해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신동이라는 열풍이 한창이었을 시기였다. 베토벤의 집안도 모차르트가처럼 음악가 집안이었다. 베토벤과 성과 이름이 똑같은 그의 할아버지(Ludwig van Beethoven, 1712-1773)는 독일 본(Bonn)의 궁정음악감독 겸 성악가로 활동한 유명한 음악가였고,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1740~1792)도 그의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 궁정가수로 활약했다.

 

 그런데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은 좋은 음악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궁정음악가라고 해도 수입이 적어 주변의 크고 작은 행사에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동네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변변치 못하게 생계를 꾸려 나가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그는 매번 술에 취해 날마다 어린 베토벤과 그의 동생들, 그리고 몸이 아픈 아내를 구박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천하의 못된 난봉꾼으로 살았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아버지 요한은 음악적 두각을 보였던 베토벤을 당대 최고의 음악가인 모차르트처럼 유명한 음악가로 키워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아들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 말이다. 그렇게 제2의 모차르트를 만들기 위한 요한의 비인간적인 음악교육은 베토벤의 음악적 감성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그릇된 야망에 의한 무자비 한 음악수업은 어린 베토벤에게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178111살의 소년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가장 존경했던 독일 오페라의 초석을 이룬 크리스티안 고를로프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를 만나며 본격 적인 작곡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스승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 공부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건반악기 수업도 함께 병행하며 그를 가르쳤다.

 

 네페의 지도를 통해 베토벤의 성장속도는 급속히 빨라졌다. 페의 문하로 있으면서 베토벤은 신성로마제국 선제후(選帝侯)의 궁정 관현악단의 건반주자로 일하며 제후의 눈도장을 얻었고, 당시 31살의 나이로 거장반열에 올라있던 모차르트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제후의 후원을 받았다. 이 때문에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사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대해서 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는 아니지만 베토벤의 제자이자 낭만주의 시대의 프란츠 리스트를 길러낸 카를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의 구전에 의하면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연주를 여러 번 들였을 정도로 모차르트와 자주 대면했다고 전해지며 모차르트가 베토벤의 대성을 예견했다고 한다.

 

 비엔나 고전의 삼총사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던 관계였. 나이순으로는 하이든이 단연 큰형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나이차이는 24,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나이차이는 14살이다. 관계로 따지면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함께 현악4중주를 연주할 정도로 각별했으며, 베토벤과는 사제지간으로 예민한 베토벤 때문에 약간은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이런 정황상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적 교감은 분명히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이에서도 그 차이가 크듯 비엔나 고전의 음악적 개성들도 각기 전혀 다르다. 하이든은 교향곡 형식을 확립시킨 고전의 창조자인 만큼 선명한 음악적 프레임을 강조했고, 모차르트는 번뜩이는 천재적 발상을 앞세운 고전적 공식을 창조해 고전시대 이전까지의 음악적 기법을 원스톱으로 정리한 전무후무한 역사를 썼다. 그리고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추구했던 고전의 신성함을 아름답게 무너뜨린 고전의 신 개혁을 이루었다. 모차르트의 독주를 막은 희대의 괴물, 그가 바로 베토벤이었다.

 

 모차르트의 시대로 불릴 뻔한 고전의 또 다른 거목의 출현은 곧 낭만의 태동을 가져왔다. 일부 음악학자들은 베토벤을 낭만주의 범주로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럴만한 데에는 몇몇의 작품에서 알 수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베토벤 <교향곡 9>의 합창(1824)이 대표적이다. 그 중 일명 환희의 송가라 불리는 마지막 4악장은 오케스트라와 혼성합창단과의 협연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의 악장이다. 합창과 관현악이 협력하는 형태는 반세기 이후에나 등장하는 낭만시대의 특수편성이다. 이를 이미 베토벤은 고전시대 한가운데에서 실현시킨 것이다. 또한 이 환희의 송가는 독일의 문호인 프리드리히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시로 베토벤은 이 시의 내용을 발췌해 합창단이 부르는 가사로 채택했다. 이것은 순수한 음악적 요소 이외의 외부적 요소를 끌어다 사용한 19세기 낭만주의 특징인 표제음악(program music)을 먼저 사용한 것이다.

 

 28살에 불현듯 찾아온 베토벤의 청각장애는 그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듯 했다. 청각 말고도 몸 전체가 성한 곳이 없었던 베토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2명의 남동생에게 남길 유서(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고 무려 25년이나 더 생을 살았다. 놀라운 것은 엄청난 정신적·육체적 고통 속에서 나온 유서 이후의 10여년 동안 베토벤의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신체적 결함은 베토벤의 창작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한 시대의 세계관을 뛰어넘는 그의 초인적인 창작은 천재 이상의 존재라 할 수 있다. 베토벤이 가진 확고한 음악적 철학은 엄격하고 이성적인 고전형식을 거부한 것으로 고전의 정석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약에 속박되지 않는 그의 정체성은 고전을 살아간 낭만주의자라 해도 손색이 없다.

 

 

체르니의 제자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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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카를 체르니에게는 특별한 제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헝가리 피아니스트 리스트다. 1819년 체르니는 8살이었던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는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제멋대로인 리스트의 연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보았던 것이다. 리스트의 정신적 미성숙함과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기교적 문제를 보완한다면 이는 필시 새로운 피아노의 역사를 세울만한 연주자가 되리라는 것을 체르니는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결국 체르니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쇼팽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었던 사람은 리스트였다. 리스트는 체력에서 나오는 위력적인 터치로 피아노의 기교적인 면을 파고들었다. 그는 남성적인 매력을 부각하며 고전의 우아함을 지향했던 쇼팽의 음악과 차별을 두었다. 어쩌면 낡아버린 재래의 관습을 버린 과감한 시도라고 봐야 한다. 피아노의 테크닉을 개발해 완성시킨 이가 쇼팽이라면 리스트는 그러한 기술적 완성도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한 파아니스트였다.

 

 광기를 만들었던 리스트의 음악세계는 1831년 프랑스 파리의 무대에서 처음 본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연주를 계기로 확립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리스트는 자신을 능가할 수 있는 음악가는 오직 파가니니뿐이라 여겼다. 최고의 연주만을 선호했던 리스트의 음악적 롤 모델은 언제나 파가니니가 우선시되었고, 그러한 영향으로 리스트의 여러 연주습관들은 파가니니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압도적 퍼포먼스와 음향 그리고 청중을 흔란에 빠뜨리는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는 흡사 파가니니의 성향과 상당히 닮아있다. 악기는 서로 다르지 만 리스트가 왜 파가니니를 그토록 숭배했는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24개의 카프리스(24 Caprices), Op.1)와 리스트의 <12개의 초절기교 연습곡(12 Transcendental Etudes)을 각기 비교해 들어보면 그 둘의 공감대를 어느 정도는 느껴볼 수도 있겠다.

 

 파가니니가 리스트의 초인적 기교에 눈을 뜨게 했음에도 피아노가 지닌 기풍만큼은 리스트도 쇼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아노 역사에 있어 이 경이로운 천재들의 관계는 애증이었다. 리스트가 지닌 쇼팽에 대한 감정은 적어도 존경심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쇼팽은 그렇지 않았다. 피아노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도 견줄 수 없을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던 쇼팽이었지만 그는 리스트가 가진 파워풀한 신체적 조건을 부러워했고 질투했다. 리스트를 향한 쇼팽의 열등감과 그의 내향적 성격은 대범하게 보이길 원했던 리스트의 외향적 성격과 합쳐질 수 없었다.

 

 분명 그 둘은 친구 사이면서도 서로를 경계했던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관계만큼이나 음악도 극과 극을 달렸던 그들. 쇼팽이 보여준 자유로운 시적 늬앙스와 리스트의 공격적인 음향효과는 어쩌면 애초부터 부딪칠 수 없는 간극이 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쇼팽의 명성은 리스트가 있어서 더욱 찬란했으며, 도전적인 낭만성은 쇼팽이 있었기에 전설이 되었다.

 

 

 김태용 / ‘5일 만에 끝내는 클래식 음악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