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예찬
봄바람이 불자 벚꽃 잎들이 꽃비가 돼 흩어졌다. 진달래와 개나리는 환하게 피어나더니, 그새 그리움처럼 희미해진다. 밤 산책길에 라일락 향기가 후각까지 들깨웠다. 봄을 감지하는 온몸의 감각들이 예민해졌다. 5월은 되어야 볼 줄 알았던 산철쭉이 일찌감치 진분홍빛 꽃봉오리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봄이 한가운데 있다. 봄을 좀 더디 가게 붙잡고 싶다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숲으로 들어가면 된다. 내가 일하는 국립수목원이 자리한 광릉숲에는 이제야 벚꽃 잎이 흩날린다. 봄꽃은 언제나 마음을 들뜨게 한다.
하지만 올봄에는 이내 지고 마는 꽃보다 더 화사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있다. 바로 나무의 새순들이 만들어낸 신록의 시작이다. 봄이 오는 먼 산에서, 아니면 가까운 공원의 나무에서, 그마저 어렵다면 출근길 길가에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에서라도 여린 잎새들을 한번 바라보자. 그냥 휙 지나쳐 보지 말고 멈춰 서서 오랫동안 바라보자.
연둣빛 새싹이라 말하지만,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지금의 연둣빛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연둣빛을 포함한 다채로운 새순들의 빛깔이 존재한다. 초록 섞인 은행나무의 새잎, 조금은 더 부드러운 연둣빛의 느티나무 새잎, 노란빛을 한층 섞은 참나무들의 새잎, 솜털이 보송하여 흰빛이 도는 가죽나무의 새잎….
그렇게 나무마다 제각각 다른 연둣빛 새잎들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어우러지는 새잎들의 향연은 은은하면서도 풋풋하고 싱그럽다. 그런 환한 풍광이 봄의 산야를 뒤덮고 있다.
(...생략...)
봄의 신록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움직인다. 보드랍고 여린 잎들은 ‘울컥’ 감동을 줄 만큼 아름답다. 다채로운 신록들은 시간이 흐르면 초록으로 짙어간다. 햇볕을 받고 열심히 광합성을 해 양분을 만든다. 그것으로 나무들은 성장한다. 나무는 자라면서 세상을 이롭게 한다. 그래서 봄날 제대로 시작된 신록은, 꽃가루받이를 통해 할 일을 다하고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꽃과는 달리,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인생의 꽃잔치가 끝나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래서 신록의 싱그러움이 마냥 부럽다면, 새잎을 내기까지 나무들이 모진 추위와 싸우고, 건조함을 견뎌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면 어떨까. 희망 가득 찬 신록 뒤에는 잎이 무성해지도록 열심히 살아 내야 하는 한여름의 노고가 남아 있고, 결실을 이뤄내야 하며, 초록을 포기하며 단풍으로 물들어 겨울을 준비하는 굴곡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런 과정을 거쳐 봄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그래서 더욱 찬란하다는 것도 잊지 말자. 봄의 신록이 모든 이에게 위로이자 희망이었으면 한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2016.4.19 경향신문)
사진출처: 유형민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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