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아줌마

송담(松潭) 2015. 12. 1. 17:17

 

 

아줌마

 

 

 

 얼마 전에 모 대학 학생들이 학내 분규로 강의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하고 있었다. 이 학교 여자교수가 농성장에 나타나서 학생들을 만류했다. 학생들은 아줌마는 집에 가라고 소리쳤다. 아줌마 교수는 울며 돌아섰다. 여대생들끼리 생맥줏집에 모여서 저희 학교 여자교수를 흉볼 때도 그 아줌마.......”라고 말한다. 대기업은 아줌마를 무서워한다. 아줌마가 이 나라 소비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류 백화점이나 고급 양품점에서는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부르면 아줌마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백화점을 관리하는 높은 아저씨들은 잘 알고 있다. 아줌마는 경멸의 대상인 것이다.

 

 이 사회의 인구구성 안에 아줌마라고 불려야 마땅한 인류학적 여성집단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아줌마라는 유형화된 질감과 는 완연하게 존재한다. 아줌마는 성적 긴장의 날이 서 있지 않다. 아줌마는 풀어져 있고 아줌마는 퍼져 있다. 아줌마의 질감은 펑퍼짐하고 뭉툭하고 무디고 질펀하다. 아줌마는 지하철의 좁은 자리에도 옆 사람을 압박해가면서 엉덩이를 들이밀고, 아줌마는 껌을 씹으면서도 거침없이 소리를 낸다. 한 번의 입동작으로 딱, , , 세 번 소리를 낼 수 있는 신기한 아줌마도 있다. 아줌마는 재매시장 좌판에서 봄나물을 살 때, 물건 파는 할머니를 윽박질러서 기어코 한 움큼을 더 집어온다. 아줌마는 고3의 재수 삼수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수능시험 때 절에 가서 빌고 입영열차 플랫폼에서 운다. 아줌마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면 진주목걸이를 세 겹까지 목에 걸 수도 있고 크림슨레드의 짙은 루주를 앞니에까지 흘러내리도록 두껍게 칠할 수도 있다. 아줌마는 하이힐 위로 찐빵처럼 부풀어오른 발등의 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래서, 아줌마들이 어떻다는 말인가. 아줌마의 유형화된 질감과 행태는 그것 때문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야할 죄업이 아니다. 오히려 아줌마는 세월과 더불어 늙어가면서 여성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사내들의 성적 시선의 사슬을 끊어버린 자유인의 이름일 수도 있다. 남성에게, 아줌마가 세월 속에서 획득한 이 자유는 매우 낯설어 보인다. 남성에게 또는 아름다운 몸매의 젊은 여성에게, 이 중년여자의 자유는 다만 성적 수치심의 미모, 혹은 성적 긴장의 이완으로 보여질 뿐이다. 남자들이 아줌마들은 당당하다고 말할 때, 당당하다라는 말에는 성적 수치심의 결여를 흉보는 의미가 들어 있다. 성적 수치심의 마모는 사회적 수치심의 상실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남자들은 생각하게 마련이다. 아마도 이것이 아줌마에 대한 집단적 폄하가 이루어지는 근거가 아닌가 싶다.

 

 얼마 전에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사진작가 오형근씨의 <아줌마 사진전>이 열렸다. 아줌마들의 여러 표정과 질감을 이 전시회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줌마들의 그 당당함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들의 자유는 쓸쓸해 보였다. 아직도 아줌마들의 자유의 표정은 소외된 자유다. 그 자유는 아직도 무언가가 더 채워져야 할 목마른 자유인 것처럼 보인다.

 

 아줌마들이 아줌마를 소외시키는 이 세상의 성적 기만과 허위에 당당하게 맞서 있기를 바란다. 실리콘이 아니라 그 당당함으로 아줌마들의 자유의 내용이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줌마들이 만원 지하철 안에서 남의 귀밑에다 대고 껌을 짝짝 씹지 말고, 봄나물 한줌을 더 가져가려고 가엾은 노점 할머니들을 서럽게 만들지 말기 바란다.

 

김훈 / ‘라면을 끓이며중에서

 

 

 

 

기사 관련 사진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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