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3
한 세대 전까지 서울 사대문 안에서 세거했던 토박이 어른들의 서울 사랑은 끔찍했다. 그분들은 북한산과 한강으로 기본구도를 삼는 서울의 웅장한 산하와 그 구석구석의 오밀조밀한 자연풍광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서울의 서울다운 품성과 삶의 질감을 자랑으로 여겼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 깍쟁이’라고 경원했던 서울의 깐깐한 품성이 그분들의 마음 바탕이었다. 대도회지의 삶의 요구하는 엄격한 계약정신과 경우 바른 시민정신, 그리고 반듯한 준법정신이 그분들의 일상의 생활감정이었다.
서울 토박이 어른들은 일상의 언어에 대해서 민감하고도 섬세하였다. 그분들의 말씨는 언제나 조용조용했다. 과장이나 허황된 비유를 쓰지 않았고, 말투에 경음이나 격음이 섞여 들지 않았다. 그분들은 의견이나 소망을 진술하는 언어와 사실을 진술하는 언어를 구별할 줄 알았고, 자신의 직접체험을 말하는 언어와 남으로부터 전해들은 말을 뒤섞지 않았다. 편차 없는 의사소통이야말로 도회지적 삶의 기본이라는 것을 그분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분들의 일상언어는 저널리스틱한 언어였다. 같은 서울 안에서도 사대문 안과 밖, 그리고 사대문 안에서도 대궐 언저리의 북촌과 남산 둘레의 남촌 사이에도 거주지에 바탕한 정서적 우월감의 다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다툼을 바탕으로 정치사회적인 패거리를 만들지는 않았다.
이제, 서울과 서울 사람들의 존재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희미하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은 이 희미한 존재성을 서울의 커다란 합리성이며 보편성이라고 여긴다. 그런 자기 위한 속에는 이미 회복할 수 없이 망가져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이 깔려 있다.
요즈음 부쩍 서울의 도시다운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 공론화되어가는 듯하다. 난감한 질문이다. 지금, 서울의 정체성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구조물은 단연코 남산타워다. 어디서든지 보이고 멀리서도 보인다. 거대한 주사기 같은 이 철근 구조물을 멀리서 바라보면, 여기가 서울임을 의심할 수 없다. 남산타워는 서울의 공간정서를 지배하고 장악한다. 말하자면, 랜드마크다. 단언하건대, 서울의 남산타워는 인류가 대도시에 세운 모든 구조물 중에서 으뜸으로 추악하다. 이 추악함은 자명한 바 있으므로 별도의 논증이나 분석이 필요 없다. 이 추악함은 우뚝하고도 힘세다. 이것은 말하자면 추악함의 인류사적 기념비인 것이다.
허네 못 허네 말도 많았지만, 중앙청을 헐어낸 것은 아무래도 잘한 일이다. 중앙청이 사라진 자리에서, 서울의 심층구조는 완연히 살아났다. 세종로 네거리에서 바라보면, 광화문-경복궁-북악산-북한산을 축으로 하는 거대한 구도 속에서, 보다 작은 존재는 보다 큰 존재 속에 안겨 있다. 그 거대한 구도 속에서 자연과 인위는 친화하고 평화는 아늑하되 나약하지 않으며 기상은 우뚝하되 거칠지 않다. 이 구도는 대도시 서울의 존재의 기본축이다. 거기에는 이 산하에서 영위되는 삶의 영원성이 담겨 있다. 이 구도는 시간을 불러들여서 살게 하는 공간이다. 거기에서 단순한 물리적 공간은 역사와 인문으로 전환된다. 정치권력의 핵심부인 경복궁은 이 기본 축선상에 놓이고, 그 정문인 광화문은 그 앞으로 뻗은 도로의 중앙축선을 이루며, 이 축선들은 북악산-북한산의 영원성에 닿는다. 이성계, 정도전 같은 조선 개국의 엘리트들이 설정한 이 기본축은 서울의 과거와 미래를 관통한다.
한강은 이제는 옛날처럼 출렁거리며 흘러가지 않는다. 물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위쪽 물길이 수많은 댐으로 막혀서, 한강은 이제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되었다. 기절한 듯이 언제나 가만히 엎드려 있다. 강은 그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양쪽의 시멘트 제방 사이에 고여 있는 것 같다. 이 결박당한 강을 만만히 여겨서는 안 된다. 한강은 하류에서 그 위용을 드러낸다. 서강대교에서 양화대교, 성산대교, 행주대교를 거쳐 김포대교에 이르는 강변남로(올림픽도로) 구간에서 한강은 점차 아득한 강폭으로 벌어지면서 무한에 접근한다.
행주산성 건너편, 강서구 가양동 양천향교 뒷산은 겸재 정선의 한강 관측소였다. 겸재의 화폭 속에서 강의 북쪽 대안에는 반짝이는 모래톱이 펼쳐져 있고, 서울의 들판이 끝나는 그 너머에는 북한산의 푸른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행주를 지나면서부터 강폭은 더욱 벌어지고 강은 흐름의 힘을 서서히 버리면서 바다와 합쳐지는 소멸의 길을 준비한다. 이 소멸은 멀고 먼 상류의 산악으로부터 바다에까지 이르는 새로운 흐름을 예비하는 소멸이다. 그리고 북한산은 그 소멸하는 강 너머에 우뚝하다. 북한산은 역사적 삶의 영원성의 표상이다. 그리고 한강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새로운 시간의 흐름이다. 북한산은 ‘있음being’이고 한강은 ‘됨becoming’이다. 이것이 서울의 서울다운 정체성의 근본이다.
서울이 아무리 망가져도, 산하가 남아 있는 한 이 정체성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남산타워는 아니다. 서울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은 비로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북한산과 한강 사이의 공간에 서울다운 합리성과 보편성을 건설하고, 서울다운 삶의 질감을 이루어내는 일이 서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다. 북한산과 한강은 크고 또 넓어서 능히 만인의 고향이 될 만하다. 다들 서울로 몰려들어서, 출신지 지역별로 정치적 패거리 작당을 한다면, 서울은 끝끝내 만인의 타향일 뿐이다. 한강은, 아직은 타향을 흐르는 강이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중에서
한성 옛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