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경험을 대체하다
일반적으로 볼 때, 보수란 대개 사회에서 연륜(年輪)이 깊고 가진 자들이 취하는 입장이다. 반면 진보는 어리고 못 가진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의 기준은 현대에 와서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먼저 연장자(senior)들은 더 이상 ‘기득권’층에 들지 못한다. 노인이 존경받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경험에 있었다. 계절이 반복되듯 별 변화 없이 흘러가는 전통사회에서는 경험만큼 소중한 생활 밑천이 없다. 예컨대 홍수가 닥쳐 어쩔 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수많은 재해를 겪은 노인의 한 마디는 곧 지혜의 말씀이고 살 길이었다.
하지만 삶의 방식이 하루하루 다르게 바뀌는 현대 사회에서 경험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과거에는 무엇이 오래되었다는 사실은 곧 그것이 검증되었음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낡고 믿을 수 없음’을 뜻할 뿐이다. 노인은 이제 경험이 축적된 데이터 뱅크(data bank)가 아니라 천덕꾸러기로 취급받는다. 심지어 이제는 청장년층의 ‘실무경험’조차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업무 흐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40대조차도 ‘사오정’으로 퇴출되고 있지 않는가.
경험은 이른바 ‘시스템(system)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시스템이란 모든 업무를 누가 맡아도 별 무리 없이 흘러갈 수 있을 정도로 매뉴얼(manual)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향은 현대 문명의 상징인 패스트푸드 업계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 업계는 이른바 ‘제로 트레이닝(zero training)'을 지향한다. 각자의 업무가 단순화하고 정확히 규정되어 있어서 어제 온 신참이라도 수년간 일한 선임과 별 차이가 없이 일하게끔 만드는 것이 목표다. 컴퓨터의 발전이 수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몇 번의 클릭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패스트푸드 업계에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이에 따라 경험이 곧 지위와 일치했던 전통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요즘 드라마 속에는 젊고 미혼인 사람이 거대한 기업의 CEO로 자주 등장하곤 한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들의 출세기반은 경험에 있지 않다. 이들의 부와 권력은 고도화한 ‘전문지식’에서 나왔다. 외국 유명 대학에서 MBA를 받았거나 전문자격증을 갖춘 이들이 현장에서 수십 년 잔뼈 굵은 사람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는 게 요즘 풍토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지식을 갖추기 위해서 들어가는 수업료는 천문학적이다. 돈이 있어야 지식을 쌓을 수 있고 지식을 쌓아야 권력과 부를 잡는다. 그러면 자손들도 고급지식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전문지식을 배우기 어렵고, 돈도 벌기 어렵다. 그 자손들도 교육의 기회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신진 엘리트인 보보스(bobos:부르주아의 물질적 실리와 보헤미안의 정신적인 풍요를 동시에 누리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엘리트 계층)들이 하나같이 자신과 자녀교육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는 점점 양분되고 있다. 돈과 지식을 바탕으로 부가가치 높은 전문직을 가질 수 있는 계급과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잃은 채, 누가 해도 상관없는 저임금 맥잡(Mcjob: 임금이 낮고 전망도 없는 일자리를 가리키는 말. 맥도날드 종업원을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만 가질 수 있는 계층, 보수와 진보의 구도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소수와, 일시적인 직장과 순간의 쾌락 외에는 그 무엇도 손에 쥘 수 없는 다수의 갈등 구조로 굳어지고 있다.
안광복 / ‘철학의 진리나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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