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살아야 한다. ‘거짓 희망’을 품고라도

송담(松潭) 2007. 4. 9. 17:26
 

 

살아야 한다. ‘거짓 희망’을 품고라도

서영은의 ‘사막을 건너는 법’을 통해 본 ‘거짓말’의 의미




 산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카뮈는 삶을 ‘시지프의 형벌’에 비유했겠는가. 신들이 시지프에게 내린 형벌이 가혹한 이유는 단지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가 아니다. 밀어올린 바위가 곧바로 굴러 떨어져 힘겨운 노동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카뮈는 그의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에게 보람 없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삶을 사막에 비유하고, 교훈했다. 어떤 희망도 갖지 말고, 그렇다고 자살로 도피하지도 말고, 시지프가 그랬듯이 사막에서 버티라고. 그럼으로써 신들에게 반항하라고. 그것만이 무의미한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서영은은 사막을 건너는 법이 있다고 한다. 반가운 소리다. ‘사막에서 버티기’보다는 ‘사막 건너기’가 좀 낫지 않겠는가? 알아보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말이다.


 1975년 발표된 일인칭 단편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은 주인공이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주인공에게는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하기만 하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오히려 반대로 낯선 땅으로 뒷걸음질쳐 가는” 느낌을 갖게 되고 “베일에 가린 듯 모든 사물, 모든 사람들로부터 차단된” 자신을 느낀다. 실존주의자들은 주인공이 갖는 이러한 의식을 ‘실존의식’이라 부른다.


실존의식이란 자기 자신과 자기가 관계를 맺는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봄으로써 그것들이 존재하는 의미를 알아내고자 하는 정신작용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나 남이 사는 대로 따라 산다. 어려서는 부모님을 따라, 자라면 친구들을 따라, 그리고 어른이 되면 세상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며 산다. 그러다 어떤 계기에 이러한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찾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실존의식인 것이다.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주인공은 월남에서 임무수행 중 적의 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동료를 잃고 자신은 부상을 당했다. 그 덕에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단지 우연에 의해 갈라서는 사건에 대한 경험은 주인공에게 실존의식을 갖게 했다. 실존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눈을 뜨는 것과 같다. 눈을 뜨기 전에도 그는 세계와 자신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눈을 뜨고 나면 그것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카뮈는 이 순간을

위대한 의식의 순간”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실존의식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세계와 자신의 의미가 이전보다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고 무의미하게 보일뿐이다. 이것이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주인공에게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카뮈는 이런 무의미성을 ‘부조리라는 특별한 단어로 불렀다. 부조리란 원래 ‘조리에 맞지 않음’, 또는 ‘이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와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가 이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라고, 곧 무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카뮈는 생각했다.


 세계와 우리의 삶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시지프인 이유다. 그러니 시지프에게 배우자. 그가 어떻게 이 무의미성을 극복했는가를. 그는 투쟁했다. 반항했다. 그러자 그 투쟁과 반항이 곧 그의 삶의 의미가 되었다. 그때부터는 신들이라 해도 더 이상 그의 삶을 무의미하게 할 수 없었다. 부조리와 투쟁하는 그 자체가 그의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카뮈의 논리이자 지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시지프는 신들마저 놀라게 해주던 영웅이었다. 누구나 그럴 수는 없다. 그만한 용기와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래서 <사막을 건너는 법>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서영은은 바위를 밀어 올리는 영웅 시지프가 아니라 동네 물웅덩이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노인을 통해 새로운 방법을 보여준다.


 노인은 월남전에서 전사한 아들이 남긴 손녀딸, 그리고 한 마리 개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아들이 받은 훈장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이 받았던 훈장을 물웅덩이에 숨겨놓았다가 다음날 노인 앞에서 건져내어 노인이 잃어버린 훈장을 우연히 찾은 듯 건네준다. 그런데 노인은 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바보 같으니라구!”라고 쏘아붙인 다음 사라져버린다. 도대체 무엇이 바보 같다는 것일까?


 알고 보니, 노인이 아들의 훈장을 물웅덩이 속에 빠트려 잃어버렸다고 한 것이나 손녀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 것, 그리고 기르고 있는 개가 아들이 키우던 것이라고 한 것, 모두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노인에게는 그것이 사막을 건너는 법이었다.

아들이 전사한 이후, 아무 희망도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노인에게는 설사 그것이 거짓말이 할지라도 바로 그것이 그를 살게 하는 힘이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서영은이 말하는 사막을 건너는 법이다. 삶을 사는 법이다.


 혹시, 당신도 가끔은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사막 한가운데 서있다고 느끼는가?

만일 그렇다면 한번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보라.

그리고 그 거짓말을 따라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보라.

분명 달라질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은

‘설사 해방군이 오지 않더라도 마치 오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거짓말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만일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면 한번 그렇게 해보자.


김용규/자유저술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저자

(2007.4.9 한겨레, 함께하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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