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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각황전

화엄사 각황전 마당으로 나선 운정은 대웅전을 향해 합장했다. 그리고 각황전 쪽으로 돌아서 다시 합장했다. '내가 일찍이 뭐라고 가르쳤더냐. 비구의 몸으로 생명의 인연을 만들려거든 차라리 그것을 독사의 입에다 넣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세존의 준엄한 말씀이 또 정수리를 내려치는 것 같았다. 운정은 고뇌스런 숨길을 다스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천 근 무게로 각황전은 드높게 서 있고, 기와 이음매의 덮개가 없어 기와골이 물이랑처럼 이어진 넓은 지붕 위에는 시리도록 흰 햇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용마루와 경계 짓고 있는 하늘은 끝 모르게 깊고 푸르렀다. 아, 저것이 필경 해탈의 빛이 아닐 것인가. 문득 생각하는 운정의 내부에는 차가운 전율이 일직선으로 뻗어내리고 있었다. 각황전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는 운정의..

조정래 소설 2023.01.08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이미 당신 곁에 있다 중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을 보았다. 묵묵히 기차역을 바라보고 있는 늙은 부부가 있다. 곱게 단장을 한 아내는 앞을 바라보고 있고, 자신의 이름을 쓴 피켓을 든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니. 어쨌든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도 그리운 사람을 기다린다고.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그런 다음 영화는 이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이미 당신 곁에 있어요.” 문화대혁명 시절,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대학교수 루옌스가 수용소를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루옌슨은 그를 체포하기..

공감 Best 20 2022.12.30

눈오는 날 걱정

눈오는 날 걱정 순천에 눈이 많이 왔습니다. 전원에 온지 만 9년 가까운데 제일 많이 내린 것 같습니다. 이곳은 시내와 떨어진 산골이라 눈이 많이 오면 교통이 두절됩니다. 오늘은 꼼짝없이 갇혔습니다. 문정희 시인이 말하는 ‘눈부신 고립’(‘한계령을 위한 연가’중)이 아닌 ‘걱정스런 고립’입니다. 문득 먼 옛날 동사무소 근무시절 산불이 나면 높은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렸는데 그때 제 어머님께서 손자를 등에 엎고 있다가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느그 아빠 고생하것다.”고 하셨답니다. 그런 후부터 어린 아들은 어디서 연기만 피어오르면 “우리 아빠 고생하겠다.”고 했다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따뜻한 방에 등을 대고 편안하게 누워있다가 출근하여 제설작업을 하고 있을 “우리 아들 고생하겠다.”고 생각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