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송담(松潭) 2006. 5. 19. 15:11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 Kopernikanische Wendung ]


 발상 전환을 의미하는 대표적 용어로 쓰이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종래와 정반대의 주장을 할 때 쓰이는 말로서, 16세기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종래의 천동설을 완전히 뒤엎은 후, 독일의 칸트가 그의 3대 비판서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폴란드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창했는데, 그때까지의 우주관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이 지배했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천동설이 그토록 오랫동안 사실로 여겨져 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눈으로 보기에는 천동설이 옳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태양. 달. 별 할 것 없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천동설은 자연스런 사실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보이는 대로 믿지 않았다. 천동설로는 행성의 궤도와 운동이 수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눈보다는 과학이 더 정확하다고 믿었으며, 우주의 중심이 태양이라고 발상을 전환할 경우 그러한 의문점이 풀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칸트 이전의 철학함의 모형은 ‘존재론적 모형’으로서 인간의 인식행위가 존재하는 것에 방향을 잡아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그려내는 데에 철학의 과제가 있다

- 인식이 대상에 의존한다 -고 생각해왔다.

이에 따르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가을 하늘이 푸르다...는 등의 자연현상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기술해 낼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의 주체는 우리 인식이 아닌 대상이며, 주관이 아닌 객관이다.

즉 존재하는 객관적 요소를 주관은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전대의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졌던 요소들에 쐐기를 박으며, 인식의 전환을 시도한다. 우리의 인식행위는 대상들(존재하는 것들)에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인식방식과 인식능력이 무엇이 우리의 인식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선험적으로 확정해준다. - 대상이 인식에 의존한다.

예컨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사실과 가을하늘이 푸르다는 것은 실제로 바깥세상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 인간이 똑같은 감각기능을 갖고 있고 똑같은 사유능력을 갖고 있어서 마치 똑같은 것을 보고 판단하듯이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개구리가 본 폭포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우리가 푸르디 푸르다고 생각하는 코발트빛 하늘색은 독수리에게는 암흑의 세계일수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법칙이라 불리우는 것들

(즉,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사실)은

실제로는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객관적 대상에 부여해준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곧 주체의 전환을 뜻하며,

대상이야말로 인식에 의존함을 뜻한다.

(즉, 물이라는 ‘대상’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의 ‘인식’이 주체가 되어 의미를 부여해 주었을 뿐이다.)고

칸트는 이야기한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사건으로서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사건에 비견할만하다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리운다.



칸트 [ Kant, Immanuel , 1724. - 1804 ]  :

독일의 철학자.

주요저서 : 《순수이성비판》(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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