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2000년 넘게 이어진 서양 철학의 체계를 세우고 서구 학문의 토태를 닦은 사람이다. 그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저작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고 가장 많이 활용된 저작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윤리적 사유의 비판적 집대성이자 윤리학을 철학의 한 분과로 만든 결정적 저작이다. 서양 윤리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이 고전이 국내 그리스 철학 전공자들의 5년에 걸친 노력 끝에 우리말로 번역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변방인 스타게이로스 출신이다. 17살 때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 아테네로 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공부했다. 플라톤이 죽자 그는 아테네를 떠나 아소스에서 아카데미아 분교를 세우고 독자적인 사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마흔두 살 때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의 부탁을 받고 그는 자식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는 사람이 됐다. 7년 뒤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원정을 준비하자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자신의 학원을 세웠다. 그는 제자들과 이 학원의 뜰을 거닐며 학문을 논했는데, 여기서 페리파토스학파(소요학파)라는 말이 생겼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의 스승이었다는 이유로 기소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이듬해 어머니 고향에서 죽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활동기는 혼란의 시기였다. 그리스 폴리스 질서가 붕괴돼가고 소피스트들의 사이비 담론이 기승을 부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 실천’과 ‘상식적 감각’으로 무장한 학문으로 이 혼란기를 극복하려 했다.
그는 스승 플라톤의 초월적 이상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했고 동시에 소피스트들의 ‘궤변적’ 상대주의에 치열하게 맞섰다. 이 두 방향의 싸움 속에서 상식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탄생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당대 윤리적 견해들 전체와 벌인 싸움의 기록이자 그의 상식주의적 통찰이 윤리적 사유에서 도달한 정점이다.
중용은 평균 아닌 복합적 균형
그의 상식적 감각은 책의 첫 장에서부터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인간의 행복’이다. 행복이란 좋은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최고선)이다. 가장 좋은 삶이 행복한 삶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무엇이 행복을 구성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을 던져 놓고 대답을 ‘탁월성’에서 찾는다.
이 번역본에서 탁월성으로 옮긴 ‘아레테’(arete)는 그동안 일반적으로 ‘덕’으로 번역돼온 말이다. 이 덕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관념에 중세 기독교의 관념이 섞여 있어 본디 뜻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옮긴이들의 판단이다. 가령, 덕이라는 관념에는 ‘여성이 순결을 지키는 것’도 포함되는데, 그리스적 의미의 아레테는 남성 시민들의 문제였다. 생활에서든 활동에서든 정신에서든 남성 시민으로서 탁월함을 보이는 것이 아레테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탁월성을 살핀다. 그는 탁월성을 ‘지적 탁월성’과 ‘성격적 탁월성’의 두 종류로 나눈다. 이 가운데 성격적 탁월성이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다.
상식주의자답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격적 탁월성이 좋은 습관의 축적으로 형성된다고 말한다. 탁월성은 교육으로 습득되고 스스로 노력함으로써 완전해지며, 우리의 품성상태가 ‘중용’의 원칙과 일치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중용이란 말하자면 양극단을 배제한 중간의 자리다. ‘무모’와 ‘비겁’이 양극단이라면 그 중용이 ‘용기’다. 그러나 중용은 단순한 산술적 평균이 아니라 여러 사정을 고려한 복합적 균형이다. 예를 들어, 경주용 자동차 선수에게는 과감함이 중용이겠지만, 유치원 통학버스 운전자에게는 조심스러움이 중용일 것이다.
참됨은 위선이 없는 사람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탁월성을 보여주는 이 중용의 덕목들을 하나하나 살핀다. 이를테면, 사람됨의 영역에서 ‘허풍’과 ‘자기비하’의 중용은 ‘진실성’(aletheia)이다. 여기서 진실성이란 흔히 ‘진리’라고 번역되는 말인데, 그 어원을 따지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 들어 있다.
진실한 사람이란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 위선이 없는 사람, 그래서 참된 사람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탁월성의 덕목들을 습관을 통해 갖추고 그것을 실천을 통해 발휘할 때 ‘가장 좋은 삶’을 살 수 있으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행복한 삶이 항상 즐겁기만 한 삶은 아닐 수도 있다. 탁월성을 실천하는 삶은 고통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것을 그는 전쟁터의 용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죽음과 부상은 용감한 사람에게도 고통스럽고 내키지 않는 것이 될 것이지만, 그는 이것을 견뎌낼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탁월성을 더 많이 지니면 지닐수록, 또 더 행복해질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그를 더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떤 사람 못지않게 용감하며, 아마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용감할 것이다. 그는 전쟁에서 이 모든 좋은 것들 대신에 고귀한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
행복한 삶을 살려는 사람은 때때로 두려운 일에도 뛰어들어야 하며, 괴로운 일도 자청해야 할 때가 있음을 이 윤리학의 창시자는 강조한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삶은 이기주의적인 삶이라기보다는 공의로운 삶에 가깝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옛날에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는 도덕 교양서로 통하는 이유일 것이다.
고명섭 기자 / (2006.11.10 한겨레)
지적 향현이 펼쳐지던 고대 그리스의〈아테네 학당〉(라파엘로 작).
아래 사진(가운데 부분 확대)에서 플라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가 왼손에든 것은 ‘에티카’, 즉〈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이제이북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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