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의 우화
“여기에 지하 동굴이 있다. 동굴 속에는 죄수가 갇혀 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두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동굴 벽만 보고 산다. 목도 결박당하여 머리를 좌우로도 뒤로도 돌릴 수 가 없다. 죄수의 등 뒤 위쪽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 죄수는 횃불에 비추인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고 산다.”
플라톤의 <국가> 속에 장치된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적인 ‘동굴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된다. 말만 들어도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지하 동굴은 우리의 현세이다. 플라톤은 우리를 동굴 속의 죄수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보고 있다. 팔과 다리를 포박당한 채, 목도 자유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죄수가 바로 당신이다.
“죄수와 횃불 사이에는 무대 높이의 회랑이 동굴을 가로질러 설치되어 있다. 이제 이 회랑 뒤에서 누군가가 인형극 놀이를 한다고 상상하자. 돌이나 나무로 만든 동물 모형, 사람 모형을 담장 위로 들고 지나가는 것이다. 죄수는 횃불에 의해 투영되는 모형의 그림자만을 볼 뿐, 실재의 모형을 본적이 없지. 인형극을 연출하는 사람들이 대사를 읽을 경우, 죄수는 모형의 그림자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인식할 거야.”
죄수는 동굴의 일그러진 벽면에 비추인 어둠침침한 그림자를 사물의 실재로 착각하며 산다. 그 죄수가 바로 당신이다.
“ 이제 죄수의 몸을 묶고 있는 사슬을 풀어주자. 모형을 죄수에게 보여주자. 당신이 보아온 동굴 벽의 이미지는 모형의 그림자였음을 설명해 주자. 죄수는 악을 쓸 것이다. 평생 그림자만 보아온 죄수는 그림자를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고집할 게야.”
사물의 그림자를 사물의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고집하는 동굴의 죄수.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플라톤은 우리가 진리라고 알아온 모든 관념에 대해 회의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회의하라. 이것이 철학의 시작이다.
“이제 죄수의 손목을 이끌어 동굴 밖으로 연결되는 가파른 통로로 안내해 봄세. 햇빛이 찬연히 부서지는 곳으로 그의 몸을 끄집어 낸 순간, 죄수의 눈은 너무 밝은 광채 앞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야. 그가 지상의 사물을 분별하려면 상당한 적응기간이 필요해.”
여기에 나오는 적응이란 철학적 사유의 훈련을 말한다. 아무도 철학자로 타고나지 않는다. 철학자가 되기 위해 최소 5년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이는 철학적 사유의 훈련을 말한다.
“동굴의 어둠에만 익숙한 죄수가 볼 수 있는 것은 사물의 그림자이겠지. 한참 후 호수에 비추인 나무의 영상을 볼 수 있겠지. 다음으로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게 될 것이네. 이제 대낮의 태양을 볼 차례이지. 태양이란 사계절과 세월을 만들어내고 모든 사물을 다스리네. 태양은 바로 모든 사물의 원인이지.”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 속에 자신의 철학적 장치들을 주도면밀하게 배치해 놓았다.
동굴 속은 현실의 세계이고
동굴 밖은 이데아의 세계이다.
밤하늘의 달 과 별은 이데아의 달과 별이다.
마침내 태양을 본다는 것은 이데아의 태양을 본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원인인 태양의 이데아, 너는 무엇이냐?
황광우/철학콘서트
< 감상문 두 가지>
1.이제야 알았습니다. 철학이 어렵다는 것을.
그림자를 실재로 보고 살았고 사물의 실재를 모르고 있었으니.
더군다나 적응기간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어찌 동굴 밖의 세계를
한꺼번에 볼 수 있겠는지.
2. 사물의, 인간의 겉모습만을 보지 말라.
눈에 보이는 모습 뒤에 숨겨진 참 모습을 찾아라.
누구든 그 사람에겐 눈에 보이지 않는 참 모습이 있다.
그것이 이데아라는 것이다.
외모의 아름다움을 보지 말고,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
그 사람의 실재인, 숨겨진 이데아를 찾아라.
그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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