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우발성‘continggency’과 ‘필연성necessity’

송담(松潭) 2007. 2. 10. 20:42
 

 

우발성‘continggency’과 ‘필연성necessity



 철학 개념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발성‘continggency’이라는 개념과 ‘필연성necessity’이라는 개념이지요. ‘contingency’라는 말은 ‘접촉하다’나 ‘만나다’를 의미하는 'contact'와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우발성이라는 말은 두 가지 사건이 만났을 때, 우리는 이런 사태를 ‘우발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필연성’은 두 가지 사건이 만났을 때, 비록 겉으로는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어떤 모종의 질서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 이것은 매우 전형적인 철학의 두 가지 경향입니다.


 어떤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 해봅시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은 남자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이 평상시 선한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며, 결국 천벌을 받았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또한 그의 유족들마저도 벼락에 맞아 죽은 그 남자를 달갑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후한 시대의 자연주의 철학자 왕충은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과 그 사람에게 화나 복이 이르는 것 사이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악한 사람에게 복이 올 수도 있고, 반대로 선한 사람에게 화가 닥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우제를 지낼 때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우발적인 사건입니다.


 왕충은 우발성을 인간 사회의 내부,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면, 신하에게는 그에 걸맞은 상이 내려져야겠지요.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과연 충성을 다한 사람이 항상 그런 대우를 받았었나요? 오히려 충성스런 신하가 어리석거나 잔인한 군주를 만나서 죽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신하가 군주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자신과 관련된 일, 즉 군주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덕목과 용기를 키우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알아줄 군주를 만났느냐, 혹은 만나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역량 밖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런 느낌은 바로 우발성의 진리로부터 유래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충성스런 신하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즉 세계에서 만남과 마주침이 편재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진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양철학에서 필연성의 철학과 우연성의 철학이 갈라서는 주장은 노자와 장자라는 두 사상가에게도 있었습니다. 노자는 만물에 앞서서 ‘도’라는 절대적인 필연성이 미리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노자가 이야기하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우리가 우발적으로 만난 후에 생기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면, 두 남녀가 만나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를 노자는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어. 그 때문에 둘이 서로 만나게 된 것이지. 서로의 노력에 의해서 갑자기 만나게 된 것은 결코 아니야.”

마치 노자는 전생이나 운명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점쟁이처럼 말할 것입니다.


 반면 장자라면 이런 경우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두 사람은 마주칠 수도 있었고, 혹은 전혀 마주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 그런데 마주쳤고 이제 사랑을 나누게 된 것뿐이야. 물론 두 사람이 마주치기 전에 사랑을 포함한 일체의 의미가 미리 존재했던 것은 결코 아니야.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은 문제는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이 우발적인 마주침에 충실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겠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존재를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물론 두 분이 서로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두 분은 우연히 마났고, 두 분의 사랑을 통해 정자‘와’ 난자가 서로 만나서 수정체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이루어냈죠. 물론 정자와 난자는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태어나서 특정한 친구‘와’ 우정을 맺은 적이 있지요? 물론 그 친구와도 만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군가‘와’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물론 이 경우도 여러분은 사랑하는 상대와 만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발적인 만남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여러분은 바로 현재의 여러분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란 확고 불변한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여러분, 그리고 저 자신은 무한한 우발적인 만남과 결과. ‘......와 ......와 ......’ 로 설명 될 수 있는 우연한 만남의 효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결코 불안해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괴로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지금과는 또 다른 사람, 혹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축복입니다.

앞으로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만남과 사건으로 여러분의 삶이 수놓아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또 다른 만남!  그리고 또 다른 변신!


강신주 / ‘철학, 삶을 만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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