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는가?
사람에게 운명이 있을까? 운명이란 ‘인간을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필연적이고 초월적인 힘, 또는 그 힘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여러 가지 일이나 상태’를 말하며, 운명론이란 ‘모든 자연 현상이나 사람의 일은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다고 믿는 이론’이다.
어렸을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의 운명이 적힌 책과 그 책을 지키는 신선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장기를 두는 두 노인을 발견했다. 두 노인은 옆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장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 사람은 두 노인 옆에 책 한 권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그 책을 들춰 보았다. 책 안에는 사람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그 밑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은 그 책이 생명부임을 알아채고 자기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十九’라는 숫자를 ‘九九’로 고쳐 아흔아홉 살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알 수 없는 힘이나 존재가 우리 운명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역사가 꽤 오래됐다. 자연의 섭리, 신의 의지, 우주의 기운 등. 하지만 이제 시대는 바뀌어 유전자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이 등장했다. 즉 우리의 행위는 유전자에 내장된 프로그램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삶은 유전자 프로그램의 전개 과정이며, 부모에게서 받은 유전자가 나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 프로그램 안에는 나의 질병과 결혼, 낙방 심지어는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까지 입력돼 있다. 그렇다면 유전자를 바꾸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런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유전자에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 모든 인간의 행위가 예정돼 있다고 하자. 이런 주장은 17~18세기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과 비슷한데 당대의 회의론자 베일은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이렇게 비판했다.
배가 바다를 항해할 때 파도와 조류, 바람과 기온은 수시로 변한다. 이 모든 변화에 대응하도록 프로그램이 배에 입력됐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베일은 감각과 지식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 예정조화설을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감각과 지식이 없는 배에도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프로그램이 모두 입력됐다고 믿기 어려운데, 하물며 매순간 육체의 움직임이 달라지고 생각마저 변하는 인간에게 이 모든 것이 미리 프로그램돼 있다고 믿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베일의 이런 비판은 예정조화설이 인간의 자유를 붕괴한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비판은 꽤 유효해 보인다. 만약 알 수 없는 힘에 지배되든 아니면 유전자에 내장돼 있든 인간에게 운명이란 게 존재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사실상 사라지고 만다. 자유가 존재한다면 우리의 환상 속에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게끔 프로그램돼 있는 것을 모르는 것뿐이다.
탁석산 / ‘철학 읽어주는 남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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