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돈오점수와 정혜쌍수

송담(松潭) 2006. 10. 18. 14:22
 

돈오점수와 정혜쌍수



 1. 선(禪) 사상의 발전


 부처의 깨달음[佛法]을 얻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부처가 한 말과 진리를 적은 경전(經典)을 연구함으로써 불법의 진리를 밝힐 수 있다는 교종(敎宗)이고, 또 하나는 말은 필요 없이 서로의 마음이 통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종(禪宗)이다


  깨달음은 우리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본성을 찾음으로써 얻어진다고 보는 것이 선종의 핵심이다.

  이러한 선(禪)의 방법은 9년 면벽(벽을 바라봄)을 통해 수도를 한

인도의 달마대사가 중국에서 시작하였다. 어느 날 신광(神光)이라는 젊은이가 달마에게 찾아와 마음이 불안하여 걷잡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달마는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라”고 명한다. 젊은이는 불안한 마음을 가져가려고 찾았으나 불안한 마음이 따로 있지 않고 찾으려는 것이 헛수고임을 깨달아 달마에게 가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달마는 “나는 너에게 마음을 안심시켰다.(我與汝 安心境)”고 대답했다.


따라서 인간은 마음의 본성만을 제대로 찾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 이 혁명적인 선종의 방법은 신라 말기에 우리나라에서도 전수되어 교종과 갈등하면서 발전하여 우리나라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 불교의 특징은 바로 교종과 선종의 대립과 갈등이며, 이 둘의 화합이 시대적 과제였다.  우리가 살펴볼 고려시대의 지눌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불교이론을 종합하여 시대상황에 맞게 적용시키면서 독창적인 한국 불교사상을 형성하였다.



2. 수심론(修心論) : 돈오점수와 정혜쌍수


수심(修心, 마음을 닦음)에 투철하면 불법은 구현될 수 있으며, 선교간의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심을 위해서는 자성(自性)을 향한 탐구가 가장 큰 과제인데 자성을 찾는 수행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길이다.

 

돈오(頓悟)란 자심(自心)을 ‘깨닫는 것’이고

점수(漸修)란 자심을 ‘닦는 것’이다.


스스로 마음을 찾는 것은 쉬운 듯 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인데 지눌은 따로 자심을 찾는데 노력하는 것보다 평소에 마음을 순화시키라고 하였다.

평소에 마음을 어떻게 조절하느냐가 문제이지 마음을 따로 찾는 것은 걱정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비록 자심의 근본을 깨달아도 점진적인 수도와 실천을 통하지 않으면 이 깨달음은 사라지고 만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인 실천인 점수가 필요하다.

그러나 깨닫기 전에 닦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몸을 닦을 때 깨끗한 물로 닦지 아니하고 더러운 물로 몸을 닦으면 닦을수록 때가 묻어 소용이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깨달음이 없는 수행은 의미가 없게 된다.

깨닫는 것은 목표와 방향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 없이 수도하는 것은 목표와 방향을 잃고 행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닦을수록 회의와 집착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수행은 올바른 깨달음 후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혜쌍수’는 점수의 내용과 방법을

‘실천적인 면’에서 말한 것이다.


정(定)이란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조용하게 하는 것이며 혜(慧)는 사물을 사물대로 보는 것이다. 즉 정은 ‘마음의 본체’를 말하고 혜는 사리분별과 판단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니라,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靈知)작용을 말한다.

정혜쌍수를 하는 점수에서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은 의심에 빠져 수행을 계속하지 못하고 여러 번 고비를 만나게 된다. 지눌은 어느 경계에서나 정혜가 자성을 떠나지 않는 방법은 계속적인 공부라고 제시한다. 점수행을 못하는 사람은 마치 돌로 풀을 누르면 도리어 풀이 더 잘 자라듯  뿌리가 빠지지 않는 생각인지라 항상 불안하고 생각마다 의혹만이 생길 뿐, 편안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정혜쌍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혜를 쌍수(함께 닦음)하기 위하여 조심해야 할 것으로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자성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서 박학다식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의지하다가 마침내 달을 못보고 마는 것과 같은 꼴이다. 그러므로 문자를 자랑하는 보통의 법사에 그치고 만다.

둘째, 마음을 통일하는 것은 정토극락을 바라는 바이지만 밖의 극락세계만을 염원하는 것은 옳지 아니 하다. 왜냐면 마음의 바램만 있기 때문에 비록 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나 성불은 멀어진다는 것이다.


 지눌의 선사상은  이러한 돈오점수설에 입각한 정혜쌍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당시 교종의 큰 흐름인 화엄학의 이론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함으로써 교종과 선종이 화합하는 길을 찾는다. 따라서 지눌의 사상은 포괄적이어서 어느 종파와도 통하는 특징이 있다. 이통현의「화엄론」의 구절에서 화합의 길을 찾았고,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후 선교는 하나라는 확신에 이르게 된다.


  “마음을 관조하고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하며 마음을 관조하는 하나만을 통해서도 화엄전반의 사상을 얻을 수 있다.”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 마음과 말이 분리될 수 없듯이 선과 교는 둘일 수가 없다.”


  선종이 언어를 도외시하고 심심상인(心心相印), 교외별전(敎外別傳)(둘다 ‘이심전심’이란 뜻)만을 강조하다보면 불교의 건전한 사상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지눌은 화엄종의 사상을 대담하게 끌어다가, 나아가 선교의 절충식 단계를 뛰어넘어, 선교일치완성된 철학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선교일치설이 대두되었지만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실천보다 이론에 중점을 두어 결국 이론에 그친데 반해, 지눌은 이론을 설립하면서도 이론을 바탕으로 한 실천에 중심을 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론적 바탕 위에서 불교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무엇일까?

지눌은 우선 자신들로부터 ‘명리(명예와 이익)를 버리고 출림에 핵심을 이루는 두 요소로서 어느 하나도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판단으로 ’정혜결사‘운동을 추진하였다. 정혜결사는 정혜를 산림에 은둔하여 쌍수하자는 실천운동으로, 세속적 명리를 추구해온 불교의 자기비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것이 지눌의 선교 융회정신의 기본이며 그가 돈오점수를 강조한 것도 선교를 하나로 융회(融會,합쳐 하나로 만듦)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3. 지눌사상의 의의와 한계


  지눌사상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중국적 영향에서 수립된 선불교에서 우리의 독창적인 선사상을 확립했다는 점이다.  지눌 이전의 선종은 중국 선종의 강한 영향 하에서 독자적인 면모가 없었다.

지눌에 이르러 비로소 선과 교, 깨침과 닦음, 돈오와 점수를 하나로 보는 회통적(會通的) 선을 독창적으로 수립하여 오늘의 한국불교에서도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또 하나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깨침과 닦음을 통하여 인간은 본래적인 자기의 모습에 눈뜨고 이를 통해 우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디디고 이어나야지 땅을 떠나서는 일어날 수 없다”라는 비유를 들어 인간의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불교의 인간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지배자의 가혹한 착취로, 농민들이 봉기하고 지방의 하층 승려들조차 참여하는 상황에서 도탄에 빠진 민중 속에서,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대신 ‘오로지 내적 수행의 길’을 추구하는 실천을, 다소 한계가 있다 할 수 있다. 어쨌든 기종의 불교사상을 조합하여 한국적 불교의 통합과 완성을 이루었다는 데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지눌(1158~1210)은 고려 의종 12년 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남.

   성은 정(鄭)씨였고 자호는 목우자(牧牛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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