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내 마음의 들꽃 산책

송담(松潭) 2021. 7. 12. 20:06

< 1 >

 

이 땅에 피어나는

야생의 백합 나리

 

 

숲에 여름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시원하게 비가 내린 뒤에는 숲속이 수분으로 꽉 채워져 더욱 싱그럽습니다. 초록 일색인 한여름 숲에 들어가면 녹색을 바탕으로 주홍색 나리꽃들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하늘말나리와 털중나리 같은 이런저런 나리 집안 식구들이요. 하긴 마을 입구에 있던 집의 작은 마당에도 한창 참나리가 피기 시작합니다. 여름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꽃을 물으면 ‘백합’이라고 하는 이가 많습니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의 꽃송이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진한 향기에 매료되었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지요. 한창 사춘기이던 시절에는 백합 향기가 가득 한 밀폐된 공간에서 죽을 거라는, 낭만인지 호러인지 알 수 없는 소녀적 상상을 한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그 백합은 자연에서 자라는 야생의 꽃이 아니라 사람들이 꽃을 크게, 혹은 향기를 진하게 하려고 육종한 원예 품종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백합은 꽃이 흰색이어서 백합(白合)이 아니라 땅속에 있는 하얀 비늘줄기(양파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100개가 모여 있다 하여 백합(百合)입니다. 영어로는 릴리Lily. 학명으로 말하면 릴리움속Lilium에 해당하는 식물입니다.

 

한눈에 나리 집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키가 가장 크고, 꽃도 크며, 꽃잎에 진한 갈색 점이 박혀 있고, 게다가 땅속의 비늘줄기는 영양 간식으로 먹을 수도 있는 나리 중의 진짜 나리는 '참나리'입니다.

 

참나리

 

 

꽃이 하늘을 보고 피는 나리는 '하늘나리', 땅을 보고 피면 '땅나리', 중간을 보고 있는 나리는 '중나리', 중간을 보고 있으며 털이 있는 것은 '털중나리, 잎이 줄기 중간에서 돌려나는 나리는 '말나리', 잎이 돌려나면서 꽃은 하늘을 보고 있으면 ‘하늘말 나리’, 울릉도 섬에서 자라는 나리는 '섬말나리', 잎이 솔잎처럼 가늘면 ‘솔나리’라고 합니다.

 

 

 

< 2 >

 

세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원추리

 

 

원추리의 한자 이름은 ‘망우초(忘憂草)’입니다. 근심을 잊을 만큼 꽃이 아름답기 때문이랍니다. 원추리 꽃에 넋을 놓고 잠시라도 복잡한 세상사를 잊어 보고 싶습니다.

 

원추리의 영어 이름은 '데이릴리Day Lily'입니다. 나리처럼 아름다운 꽃이 피는데 한 송이가 하루만을 살기 때문이라 합니다. 아름다움의 유한함은 동서양이 같은 모양입니다. 물론 한 포기에서 꽃대가 올라와 송이가 달리는데, 피고 지면 옆에서 다시 피고 지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기에 제법 오래 꽃을 보는 듯합니다.

 

우리의 어른들은 원추리를 먹을거리로 칩니다. 봄에 난 어린 싹은 독성이 없는 아주 좋은 나물이어서 살짝 데쳐 무쳐 먹기도 하고, 국을 끓여 먹기도 하며, 더욱 멋지게 어린순과 꽃을 따서 김치를 담그기도 하고, 꽃을 된장과 함께 쌈을 싸서 먹기도 한다지요.

 

꽃을 말려 몸에 지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음이 있어 ‘득남초’라는 별명도 있어요. 꽃 한 송이에 세상의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모든 원추리를 모아 정원에서 즐길 만큼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래도 지리산 노고단 정상에서 구름을 지고 피어나는 야생 원추리 군락이 제게는 최고입니다.

 

 

< 3 >

 

연꽃과 수련

 

많은 이가 연꽃과 수련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꽃은 땅속에 굵은 뿌리를 박고 잎은 물 위로 올라와 자라지만, 수련은 잎 뒷면을 물 위에 대고 물에 떠있는 듯 자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연꽃이 불교와 연관된 동양의 꽃이라면 수련은 물의 요정으로 등장하는 서양의 꽃이랍니다.

 

 

< 4 >

 

크고 붉은 꽃의 아름다운 풍광

석산

 

 

 

석산은 '꽃무릇'이라고 부릅니다. 선운사나 불갑사와 같은 남쪽의 유서 깊은 사찰 근처의 숲에 가면 나무 밑에 무리 지어 끝도 없이 피어나는 이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줄기에 잎도 없이 쑥쑥 꽃대를 올려 큼지막하게 피어나는 붉은 꽃이며, 나무 그늘 속에서도 큰 꽃 무리를 이룬 풍광은 정말 인상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석산은 알고 보면 꽃이 필 때 잎이 없고 잎이 필 때 꽃이 없는, 그래서 잎과 꽃이 항상 그리워한다는 상사화와 같은 집안 식물입니다. 이 꽃으로 유명한 한 지자체의 군수님은 ‘상사화’라고 해야 꽃을 보러 찾아오는 분들께 여러 이야기를 엮어서 알릴 수 있으니 이름을 바꿔 달라 조르신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분홍빛 상사화는 따로 있으니 제 맘대로 그리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여러 숲에 지천으로 있으며 매년 절로 자라고 스스로 퍼져 간다며 자생 식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원래 이 꽃의 고향은 중국이고 사찰에 일부러 심었던 것이 퍼져 나간 것으로 알뿌리가 쪼개어져 무성 번식한 것이어서 씨앗을 맺지 못하는 까닭에 아직은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 5 >

 

갈대와 억새

 

흔히들 억새를 두고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혼동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갈대는 낙동강 하구 같은 물가에 사는 식물이니 메마른 능선에 끝없이 이어져 우리가 산에 오르면 볼 수 있는 건 갈대가 아닌 억새입니다.

 

< 6 >

 

겨울에도 견디며 여름에 꽃피우는 금은화

인동덩굴

 

 

인동(忍冬)을 이름 그대로 풀면 '겨울을 견뎌 낸다'는 뜻이니 겨울식물인 듯한데, 알고 보면 꽃을 피우는 시기는 한여름입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부터 꽃을 피워 향기를 온 사방에 퍼트리며, 겨울에는 잎을 떨구고 까만 구슬 같은 열매만 보이는 그런 식물이지요. 그래서 인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따듯한 남쪽으로 가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환경이 온화하니 겨울이 되면 잎사귀가 왕성하진 않아도 여전히 푸르게 살아남아 있고, 더러는 꽃을 피워 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인동덩굴은 겨울을 견뎌 내는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동덩굴은 '금은화'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색깔 때문에 붙여진 별명으로 인동덩굴의 꽃을 보면 흰 꽃과 노란 꽃이 한 나무에서 그것도 바로 나란히 붙어서 피는데, 노란색 꽃을 두고 '금화' 흰색 꽃을 두고 '은화'라고 하여 '금은화'로 부릅니다. 별명이 이러하니 인동덩굴이 길조를 상징하는 식물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흰 꽃과 노란 꽃이 각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흰 꽃이 먼저 피었다가 시간이 지나고 개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노란색으로 변하는 것이랍니다.

 

 

< 7 >

 

9월, 가을 햇살에 풍성해지는

결실의 계절

 

 

한낮이면 아직도 무더위에 땀이 흐르지만, 아침저녁 슬쩍슬쩍 드는 바람에 어느새 선뜻함이 느껴져 좀 이르다 싶어도 ‘가을’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파란 하늘에 청명함이 가득하니 가을은 이미 이만치 다가서고 있는 것입니다. 하긴 벼 익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입추도, 모기의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도 지났으니 말입니다.

 

들엔 가을강아지풀이 이삭을 휘어 바람에 설렁입니다. 지난여름부터 익어 가던 뜰보리수 열매들도 유난히 붉게 익어 가을바람 따라 흔들거리네요. 아직은 푸른 단풍나무 열매는 점차 날아가기 위해 잠자리 날개처럼 그 날개를 가볍게 할 것입니다. 성장의 계절에서 결실의 계절로 바뀌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고 있음은 식물에게 여러 가지를 의미합니다. 이어서 다가올 모진 추위를 준비하는 긴장의 시간인 동시에 한 해의 성장을 마감하고 충실한 씨앗을 맺어 멀리멀리 안전하게 보내는 가장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순간을 위해 지난봄, 싹을 틔워 올려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키를 키우고 잎을 펼쳐 양분을 만들며, 꽃을 피워 곤충을 부르는 그 숱한 노고들이 존재한 것 아닐까요?

 

이런 모든 노력 덕분에 사람의 가을도 풍성합니다. 가을 햇살을 받이 무르익은 이 행복한 수확은 모두 자연에서 가져온 산물이지요. 지금도 동남아시아의 들판엔 야생의 벼가 자라며, 안데스산맥에선 야생의 감자가 크고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과일들도 가을에 얻는, 나무가 만드는 달콤한 수확 중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 세계에서 자라는 야생의 나무들을 사람의 목적에 따라 더욱 달게, 더욱 크게, 혹은 특별히 비타민이 많거나 추위에 강하게, 아니면 빛깔을 곱게, 병충해에 강하게 개량한 것이 여러 과일나무의 품종입니다. 예를 들어 가장 먼저 익는 벚나무 열매 '버찌'는 말하자면 국내파 체리입니다. 키위와 사촌인 달콤한 '다래', 배보다 더욱 향긋한 '산돌배', 그리고 포도의 조상인 '머루'가 있습니다. 참고로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자생하는 나무들의 풍부한 유전자 풀Pool이 잘 보전되어 있어야 비로소 개량하고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식물들은 왜 이렇게 달고 맛있는 과일을 만들어 낼까요? 간단합니다. 씨앗을 통해 자신의 종족을 더 멀리,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식물들은 달고 맛있는 과육을 사람이나 동물에게 제공하고, 이들은 멀리 돌아다니며 씨앗을 뱉거나 배설하여 다시 바깥으로 내보냅니다.

 

이 가을엔 숲속에서 들판에서 제각기 익어가는 열매 구경을 권하고 싶습니다. 눈여겨보노라면 이들이 지니는 갖가지 멋진 모습에 감탄할 것이며, 그 각각이 가진 전략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시간은 충분히 재미나고 행복한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섯가지 맛을 낸다는 붉은 ‘오미자’나 ‘으름’을 구경할 수 있다면 정말 행운입니다. 그렇게 보내는 가을의 시간은 몸과 마음을 가을 하늘빛만큼이나 신선하게 바꾸어 줄 것입니다. 그윽한 산국의 향기와 함께 구수한 낙엽의 낭만까지 자연은 덤으로 선물을 줍니다.

 

< 8 >

 

열매 요리가 늘 수라상에 오른

상수리나무

 

 

 

진짜 나무 참나무입니다. 하고 많은 나무 중에 바로 이 나무가 참나무가 되었습니다. 참나무 집안 이름이 학명으로 쿠에르쿠스Quercus 인데 이 라틴어에도 '진짜', 즉 '참'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산의 숲들이 소나무 숲에서 참나무 숲으로 변해 간다고 합니다. 우리 산의 주인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나무를 모르신다고요? 식물도감에도 없다고요? 맞습니다. 흔히 도토리가 열리는 졸참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그리고 상수리나무를 한데 묶어 '참나무'라고 합니다. 상수리나무가 이러한 동족과는 조금 다른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토리'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몽진한 선조가 제대로 먹을 만한 음식이 없을 때 이 나무 열매로 만든 묵 맛에 반해 그 후로도 즐겨 찾았답니다. 그래서 ‘상시 수라상에 올랐다’ 하여 ‘상수라’라고 불렀고, 이 말이 ‘상수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상수리나무의 가을 단풍 빛이 참 그윽하고 멋집니다. 가을빛이라는 표현 그대로예요. 이렇게 단풍 든 잎들은 다 마르도록 오래 가지에 달려 있습니다. 때론 새봄이 와서 새잎이 날 때까지도요.

 

 

이유미 글, 송기엽 사진 / ‘내 마음의 들꽃 산책’(진선출판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