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머리 아닌 몸으로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할 때 흔히 동기 부여가 안 되어 그렇다고 말한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안 한다는 논리다. 목표가 뚜렷하고 의지가 굳으면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동기 부여도 환경이 받쳐줘야 되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설령 된다 해도 목표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의 에너지는 오래 가기 힘들다. 행위와 목적은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민족이나 민중을 ‘위하는’ 행동이 쉽게 변질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강은 바다에 이르기 ‘위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다. 물길이 바뀌는 것은 주변 지형과 중력이 만들어내는 위치에너지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진정한 변화는 ‘의하여’ 일어나지 결코 ‘위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둘러싼 환경과 맥락이 바뀌어야 아이가 바뀐다. 교육에서 곧잘 ‘동기 부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동기가 아이를 변화시키기는 힘들다. 굳은 결심도 흔히 작심삼일이 되는 까닭은 어떤 목적을 위한 행동에는 에너지가 자체 조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성력이든 중력이든 모든 에너지는 ‘의하여’ 작동한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마감 시한에 가까워서야 글을 쓰기 시작해 탈고를 하게 되는 것도 ‘의하여’ 에너지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준다. 공부 또한 그렇다. ‘위하여 공부’는 위함의 대상이 무엇이든 공부 그 자체에서 에너지를 얻지 못하는 반면, ‘의하여 공부’는 자체 에너지로 앞으로 나아간다. 습관이 중요한 까닭이다.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자리 잡고 공부를 함으로써 몸과 뇌가 그 패턴에 적응하여 저절로 작동하게 만든다. 동기나 목적의식보다 습관의 힘이 더 세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문을 담당했던 강원국 작가가 ‘루틴’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첫 문장을 쓰는 일은 막막한 법이다. 그는 아침 산책을 하고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것을 정해진 의식 행하듯 하다 보면 여하튼 글이 써진다고 말한다. 뇌가 ‘이젠 꼼짝없이 글을 써야 하는구나’ 하고 인식하게 만드는 과정이란다. 말하자면 몸의 힘을 빌려 뇌를 길들이는 방법이다. 습관은 뇌가 몸의 말을 듣게 만드는 과정이다. 수십억년에 걸쳐 진화해온 우리 몸은 자체의 지성을 갖추고 있다. 운동이든 악기 연주든 몸을 움직이는 모든 활동은, 뇌를 거치지 않고 몸의 지성이 작동할 때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마라토너가 어느 시점에서 느낀다는 ‘러너스 하이’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뇌가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뇌를 통제하는 단계다. 무아지경에 가까운 몰입 상태다.
습관(習慣)은 뭔가를 하고 또 해서 관성의 힘이 작동하는 것이다. 뭔가를 익히는 과정 또한 습관을 들이는 과정이다. 배운(學) 것을 틈틈이 익히는(習) 것이 학습의 요체이듯, 좋은 마음과 태도를 몸에 배게 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다. 학습과 교육에서 ‘습’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좋은 습을 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습은 몸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몸으로 하는 것이다.
입시교육이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게 만드는 데 비해, 진짜 공부는 배우는 것이 좋아서 배우고 익히기를 즐기는 것이다. 공자의 호학(好學)이다. 어미가 자식을 안고 기뻐하듯이(好) 배움을 즐기는 이 상태는 ‘의하여’ 원리에 따라 에너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태다. 한번 몰입하면 그 에너지가 계속 이어진다.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다. ‘위하여’가 심리의 세계라면 ‘의하여’는 물리의 세계다. 심리는 물리를 넘어설 수 없다. 나무는 하늘과 땅의 에너지에 ‘의하여’ 성장하지, 하늘 높이 자라기 ‘위하여’ 성장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성장도 그렇다. 내일을 위해 사는 아이들의 오늘은 결코 빛날 수 없다.
현병호 /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2021.8.19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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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은 언제부터 빈말이 되었나
최창대(1669~1720)가 병으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던 때의 일이다. 소동파의 시를 읽다가 “병으로 한가로운 것도 나쁘지 않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무릎을 쳤다. 이 구절을 부연하여 ‘진심음(眞心吟)’이라는 제목으로 9편의 시를 지었다. 9편 모두 “병으로 한가로운 것도 나쁘지 않으니, 한가로워야 진심이 드러난다(因病得閒殊不惡 得閒因得見眞心)”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바쁜 일상에서는 진심이 드러나지 않는다. 한가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만끽할 때, 비로소 진심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한가로워야 진심이 드러난다고? 진심은 급할 때 드러나는 것 아닌가? 평소 성인군자처럼 행동하던 사람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양심과 윤리를 내팽개치지 않는가? 오해다. 급박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비윤리적 행동은 동물적 생존 본능에 가깝다. 본능과 진심은 다르다. 운전자는 갑자기 장애물이 나타나면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는다. 조수석에 탄 사람이 대신 죽기를 진심으로 바라서가 아니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우선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평소 악행을 자행하던 자가 급박한 상황에서 갑자기 선량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진심일까. 갑질과 폭언을 일삼던 자가 여론의 지탄을 받고서야 비로소 내놓는 사과는 진심일까. 잔혹범죄의 가해자가 판결을 앞두고 선처를 바라며 흘리는 눈물은 진심일까. 진심은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 평소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법, 한가로워야 진심이 드러난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최창대는 9편의 시에서 진심의 아홉 가지 특성을 말했다. 첫째, 진심은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 내 진심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둘째, 진심은 계산 없는 마음이다. 이해득실을 따지면 진심이 아니다. 셋째, 진심은 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내 몸 밖의 명예와 이익을 원하는 마음은 진심이 아니라 욕심이다. 넷째, 아무것도 진심을 막지 못한다. 진심 어린 말과 행동은 어떠한 위협과 회유로도 막을 수 없다. 다섯째, 진심은 못 가는 곳이 없다. 진심이 담긴 이야기 한 편은 시공을 초월하여 감동을 준다. 여섯째, 진심은 짐승도 감동시킨다. 사람의 진심은 동물도 알아주는 법, 같은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도 진심은 통한다. 일곱째, 진심으로 오래하면 어려운 일이 없다. 진심이 쌓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이루지 못했다면 오래하지 않았거나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덟째, 인간의 문명은 진심의 산물이다. 역사에 길이 남은 위대한 업적은 모두 그 일에 진심이었던 사람들이 이루어낸 성과다. 아홉째, 진심은 천지신명이 알아준다. 당장은 남들이 믿어주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처럼 진심은 만능이다. 하지만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진심이라는 말에 과연 얼마만큼의 진정성이 담겼는지는 의문이다.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은 이제 식상하다.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말도 믿기 어렵다. “사죄에 진정성이 없다”는 말도 저의가 의심스럽다. 남의 진심을 어떻게 알겠는가. 행동이 따르지 않는 진심은 빈말에 불과하다. 진심은 싸구려로 전락하고 말았다.
진심만큼 값어치가 떨어진 말이 또 있다. 다름 아닌 진실이다. 전문가의 조사 결과도, 법원의 판결도, 진실은 따로 있다고 우기는 자들을 설득하지 못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이 거짓을 진실로 믿게 만든 탓이다. 이러니 이른바 ‘진실’은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심화시킬 뿐이다.
진심도 진실도 믿을 수 없는 시대다. 진심이 빈말을 꾸미는 수사로 전락한 것처럼 진실은 거짓을 포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진심과 진실의 개념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진심은 “빈말의 다른 표현”, 진실은 “일방적인 자기주장” 정도가 적당하겠다. 진심이라는 빈말, 진실이라는 거짓에 속지 않으려면 기억해두자.
장유승 /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2021.8.19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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